LAX 공항에서 - 김영교


그 날도 높고 파아란 하늘 치마폭은 가이없이 넓었다. 하늘에서 넘쳐 흘러내리듯 초록 빛깔은 온통 세상을 맑고 투명하게 가득 채웠다. 지난 해였다. 금요일 오전 9시55분, K017 편에 탑승한 남편을 마중하러는 LA 국제 공항엘 갔다. 세 시간 반이나 하는 연착은 처음 겪는 일이고보니 집에 가기도 어정쩡했다. 사전에 도착시간 확인하지 못한 이 기다림은 내 부주의라 전부 감당해야할 내 몫이었다. 

 

궁리 끝에 우선 차에 가서 시집을 한권 찾아 바깥 벤치에 앉아 읽기로 했다. 벤치는 깨끗했다. 번잡 속의 고요랄까 조용한 주위가 책읽기에 적합했다. 때마침 코끝에 와 닿는 아침바람이 허파까지 내려가 온 몸의 피를 돌리는 듯 퍽 상쾌해졌다. 심호흡을 했다. 사이사이에 불어오는 아침 바람은 때 묻은 일상을 털어내는듯 했다. 하늘이 성큼 내려와 가슴에 안겼다. 그리고 연처럼 창공으로 함께 솟아올랐다. 되풀이 되는 기류의 순환, 퍽 오랜만에 망중한을 즐기며 나만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느슨해진 의식은 생각의 물줄기를 안으로 몰고 갔다.

 

공항은 축소된 인생의 작은 운동장이다. 수없이 많은 무더기 사람들의 물결이 가기만하는 게임과 오기만하는 게임이 연속적으로 교체되는 곳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엇갈리면서 울고 웃으면서 포옹도 악수도 한다. 손 흔들며 헤어진다. 주위에서는 모두 동정어린 시선으로 봐주기도 하고 호기심으로 구경꺼리 삼는 시선들도 있다. 만남과 작별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에 점 점 점의 떠남과 맞이함의 현장이다.

 

실내에 들어서자 의자에 지친 듯 늘어진 사람이 보였고 더러는 활기에 차 싱싱하게 우글댄다. 공항대합실 풍경이다. 언젠가 희망이 없는 듯 답답한 공간에서 축 늘어져 있었던 바로 내 모습도 떠올랐다. 거의 시들고 메마른 나무였던 그 때 내 모습, 나는 놀람과 절망, 그리고 고통, 외로움 많은 삶의 비행장에서 눈물도 쏟고 한 숨도 토해 내며 억울해 하기도 했다. 투병친구들 중에 탑승은 하고 영영 가족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친구도 기억났다. 

 

비행기가 증발한 사고는 아니지 않는가. 세 시간 반 비행기 연착은 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받아드리고 이해하기 전에 투덜대며 화부터 냈을 옛날의 나, 짜증이 나는 만큼 속이 상해 가슴은 마냥 답답했을 것이다. 늘 신나는 금요일 오전이 스트레스에 잡혀 소중한 건강을 갉아 먹도록 방치했을 터이고...이 모든 것이 얼마나 사망적인 색깔들인가. 


질병의 벽에 균열이 오면서 무겁게 닫힌 문이 서서히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어둠과 작별하고 회복에 탑승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은혜였다. 새 생명의 푸른 옷은 다가와 나를 입히고 나를 어루만져 일으켜 세웠다. 보이지 않는 동행이 매 순간 개입되어 있었음을 이제는 고백할 수 있다.

 

연발 소식에 그 많은 승객을 실은 비행기가 무사하기만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친구 남편이 죽은 괌 추락사고의 비극이 떠올랐기에 더욱 그랬다. 피치 못할 그럴만한 연착 사유가 있었겠지, 자기넨들 다급한 비상사태를 수습하려 동분서주 했겠지.... 사람의 생명을 실어 나르는 공중운송은 지상에 있는 우리의 영역 밖이다. 순간 손에 땀이 나는 긴장감은 멀리- 다 맡기는 편한 마음이 되어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 내 마음을 관리해주는 이 구절 때문에 나는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바람에 묻어오는 계절을 느끼며, 기다라는 사람들 틈에서 관찰하며 기다리며 이해하는 소중한 체험 을 할 수 있었다.

 

경건의 삶속엔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래서 삶의 문제를 만날 때도 내적 기도의 갈망이 항상 출렁인다. 어떤 상황과 여건에 대처하는 반응과 태도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라 했다. 책임 있는 성숙한 인간에의 길은 형편과 여건이 변화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문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나 반응이 바꾸어지도록 노력하는 편이라는 결론이 섰다. 비행기 연착이란 환경은 변경되지 않았지만 거기에 대응하는 내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상의 바다를 요동치게 한다. 거센 폭우가 불어 닥치고 캄캄한 밤도 있고 세상이 어두움 그 속으로 잠기기도 한다.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 안내는 인간의 지식을 뛰어 넘는다. 두려움의 안개는 걷히고 고통의 긴 밤은 소망의 새벽 앞에서 허물어져 내린다. 이럴 때 사고로 인한 비행기 전체의 결항보다 세 시간의 비행기 연착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남편은 무사히 안착했고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아니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삶의 현장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KAL기의 연착 같은 사건은 우리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경건의 내용물이 되기도 한다. 일상의 우물에서 고마운 마음을 한없이 길어 올린 남편 마중 공항 단상(斷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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