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러움

2018.07.17 06:28

한성덕 조회 수:27

쑥스러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사람의 하는 짓이나 그 모양이 격에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고 싱거울 때, 또는 어색하여 부끄러울 때, ‘쑥스럽다’라는 표현을 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쑥스러운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신혼초기였다. 곱디곱고 아름다운 손이 거칠어질세라, 어여쁜 얼굴의 뽀얀 화장이 지워질세라 각시를 애지중지하던 때였다. 찬거리를 장만하는 새색시의 모습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양귀비가 따로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쳤다. 아내는 피아노를 치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고, 나는 부엌으로 나가서 아내 대신 설거지를 했다. 단칸방에 달린 자그마한 부엌은 소꿉놀이처럼 옹색했다. 앞치마를 두른 채 부엌데기 노릇 좀 할 참인데 교회 권사님이 들이닥쳤다. 금방 담근 김치라며 한 통 갖고 오신 게 아닌가?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맞이할 겨를 도 없이 엉거주춤 서 있는데, “와!~ 우리 전도사님 참 멋지시네!” 하셨다. 쑥스러워 혼났지만 칭찬에 감탄했다.

  김학 교수님으로부터 4년 째 수필을 공부한다. 4년 동안 목회의 동역자 여러 명을 소개해서 인도한 바 있다. 이번 7월 특강은 쉬려고 했는데, 초등학교 여학생동창이 가고 싶다는 바람에 안내 만 하기로 했다.  

  동창은 통화할 때부터 약간의 두려움이 보였다. 인생끄트머리에서 새로운 분야에 들어가는 건데, 낯선 사람들과 ‘어떻게 사귀느냐?’고 몹시 망설였다. 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라든지, 어떤 주제로 토론이나 발표를 하라든지 하는 것이 ‘제일 싫다.’며 안 가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초등학교 선생으로 퇴직한 친구다. 아이들만 상대해서 어른들과 얘기하려면 멋쩍을 때가 많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염려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우리 수필반은 수강생들 모두가 초등학생’이라고 했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몇 번을 확인하기에 ‘날 믿어도 된다.’며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 한다며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시간 전에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양산을 받쳐 들고, 모자를 쓴 깔끔한 차림의 멋스러운 숙녀가 사뿐사뿐 걸어오는 게 아닌가? 수필 배우는 것을 남편이 더 좋아한다며 태워다 주었단다. 그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고 인사를 나누자 보드라운 촉감이 뇌를 자극했다. 한 쌍의 연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어디에서 만난 것보다 이토록 기쁜 이유는 뭘까?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교실에서 지내다가,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어 한 강의실에서 수필을 배우게 됐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의자에 함께 앉았는데, 50년 전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나란히 앉으니 좋아지내던 초등학생시절이 아른아른했다.  

 

  강의가 시작되고 친구의 소개시간이 되었다.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성덕이가 이웃학교로 전학해서 헤어졌다가 50년 만에 만났다. 그 때 수필을 배운다며 김학 교수님을 소개하고, 강의실 분위기가 너무 좋으니 한 번 오라고 했다. 얼마나 좋으면 50년 만에 만난 내 앞에서 수필 이야기를 다 할까? 마음에 두고 있다가 오늘에야 오게 되었다며 매우 좋아했다. 차분한 그의 성격대로 말을 조곤조곤 잘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 ‘헤어졌다가 50년 만에 만났다’는 말을 야릇하게 느꼈는지, 강의실 뒤쪽 맨 끄트머리에서 "친구가 한 목사를 좋아했던 거 아닌가요?" 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이 순간을 어떻게 넘기려나 했는데, 다시 일어서더니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성덕이는 예쁘고 영리해서 공부도 공부지만 모든 것을 잘했다. 반장이었는데 모든 여학생들이 다 좋아했다. 알고 보니 어머니와 같은 한()씨여서 말은 못하고, 성덕이를 그저 좋아하기만 했다는 게 아닌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포장이요 엄살이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친구요, 숙녀다운 품격을 지닌 진솔한 우정의 시간이었다.    

  내 얼굴이 화끈화끈했던 것을 보면, 붉게 물든 저녁노을의 낯빛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쑥스럽든지 엉겁결에 얼굴을 가리며, ‘아유, 쑥스러워!’하고 말았다. 문우들의 두 번째 폭소가 터졌다. ‘칭찬’과 ‘좋아한다.’는 말의 진수를 이처럼 느낀 적이 또 있던가? 여성친구 때문에 강의시간 내내 흐뭇했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인생에서 쑥스러운 일은 더러 있어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2018.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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