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기억

2018.07.31 16:21

조형숙 조회 수:34597

   모스크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흰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다. 맘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공산당이 무섭다고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이승복은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가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 당했고 공산치하를 겪은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무엇인가 침침하고 어두운 느낌이 계속되었다. "뭐야 사람이 없는건가"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가니 낮은 아파트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은 없고 베란다 같은 곳에 빨래들이 많이 널려 있었다. "사람이 사는구나" 그제서야 우리 일행은 맘이 조금 편안해졌다.  
 
   도착한 호텔은 무척 넓었다. 식사를 하려고 앉은 앞 쪽 무대에서는 짙은 화장의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러시아의 처녀들은 뺨이 붉고 눈동자는 크고 검었으며 피부는 희고 곱다. 안내인의 설명이 이어진다. 러시아에는 40에 대한 이야기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하 40도가 아니면 모스코바 날씨가 아니다. 둘째, 여자 나이가 40이 넘으면 여자가 아니다. 그저 살찐 아줌마일 뿐이다. 셋째는 40도를 넘지 않으면 보드카가 아니다. 이야기와 함께 무대를  감상하고 있는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닭을 넣어 만든 볶음밥이 나왔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닭을 뼈 채 쪼아 넣어 씹을 때마다 뼈조각이 혀에 걸렀다. 사과는 작고 모양이 없고 맛도 없었다. 오이는 등이 휘어 꼬부러졌으며 껍질은 질겼다.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추운 나라의 과일과 야채들이었다. 알마타는 사과라는 뜻인데 나중 알마타 여행에서는 맛있는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연주를 위해 우리 합창단을 초청한 교회 기관에서는 점심으로 피자를 대접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낮 12시 였는데 두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사온 것이라 했다. 우유 한 팩도 한 시간을 서 있어야 살 수 있다.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살 수 없다 한다. 우리가 여행한 것은 1989년 가을이었다. 1불을 바꾸니 아이들 장난감같은 붉고 작은 돈을 32장이나 주었다. 가방 가득 그 붉은 돈을 넣고 다녔으나 사고 싶은 물건이 별로 없었다. 
 
   모스크바 시내는 싸늘하고 추웠다. 모피 코트를 입고 긴 부츠를 신은 여인들이 너구리 털모자를 쓰고 마후라도 둘둘 말아 걸쳤다.  옷 소매 사이에 양 손을 끼운 채 고개를 푹 수구리고 죄인처럼 걷는다. 가끔 큰 개와 함께 걷는 사람도 있다. 강추위를 견디는데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다. 추운 기온 속에서도 붉은 광장에서는 얇은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랑이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아주 행복하고 밝은 모습이다. 광장의 레닌 묘지를 지키는 보초들의 교대 시간이 되자  총을 맨 군인들이 90도로 다리를 올려 걸으며 나타나고, 보초서고 있던 군인들은 사라졌다. 광장의 아름답고 황홀한 바실리우스 성당(붉은광장 앞에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너무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에 반한 이반 4세는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건축한 사람인 바르마의 눈을 멀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을 보면서 국민들이 살기가 힘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했다.
 
   타슈켄트에서 우리 단원들은  민박을 하기 위해 큰 공화당 앞에 여행가방을 가진채  둥그렇게 둘러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조는 두사람으로, 이름을 부르면 동네 주민을 따라 그 집으로 갔다. 내가 간 집은 50세의 할머니와 30세의 딸이 교사를 하고 있었고 10세의 손녀가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일찍 결혼을 하는 것 같았다. 집은 좋지는 않으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큰 양은다라이에 밤새도록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안쓰는 전기 코드는 다 빼놓고 수돗물 아끼는데 이골이 나있는 우리로서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물이 넘치도록 그냥 둡니까?" 물었더니 "상관없소. 나라에서 다 내주니까"라고 했다. 나라에서 똑같이 나누어주니 아낀다고 내 이득은 없는 것이고 모든 주민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어렵게 살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낭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한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모녀가 정성으로 빚어주는 만두를 먹으며 어린 추억이 담긴 연해주를 떠나온 이야기를 들었다.타슈켄트의 넓고 황량한 들판에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고 그 사이를 바람이 가르고 지나간다. 저렇게 넓은 땅이 한국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나라 경제에 큰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토질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한다. 연해주에 살던 50만명의 고려인들이 한 겨울에 러시아로 보내졌다. 타슈켄트의 고려인들은 좋은곳으로 보내준다는 국가의 지시 (1930년에 소련에 의해 시행된 첫번째 민족 이주정책)에 따라 기차를 탔다. 치르치크강이 있는 남부지역에 집중 하차했다. 내려보니 척박한 땅에 그 들도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토굴생활을 하는 고통을 겪으며 강한 생명력으로 버텨 다시 일어났다. 황무지를 개척하고 집단농장을 경영하며 소수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우리가 갔던 때에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나 내 마음은 좋지 않았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었다. 동유럽 국가들과 소비에트연방 국가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시민운동을 일으켰다. 운동이 점점 번지면서 정권은 무너지고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요한 바오로 2세의 만남이 힘이 되었다 한다. 이제는 15개의 독립공화국으로 분리된 소비에트 연방이 각자의 개성대로 치리하여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한다. 특히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으로 민주체제를 설립하고 많은 여행객의 방문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에스토니아는 I.T인터넷 강국으로 인터넷이 빠르고, 화상전화 본사가 있다. 문호가 개방되어 무조건 이민을 받아주고 민주체제가 되었다. 식당과 옷, 길거리는 중세를 그대로 유지 하면서도, 동시에 신문화를 받아 들이는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내 기억 속에 있던 움츠린 구 소련의 모습은 지워 버리자. 다른 공산국가들도 다 함께 밝게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와 함께 행복해야 할  북한도 속히 변화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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