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속옷을 입으면 생각나는 분

2018.08.03 05:54

최미자 조회 수:118

여름 속옷을 입으면 생각나는 분

무더운 여름이면 나는 친정어머니가 입으셨던 속옷을 입는다. 어머니가 노인아파트를 떠나며 마지막 짐을 정리할 때 옷장을 열어 그분의 옷인 맞춤 정장과 원피스를 나에게 권했지만, 나는 속옷들을 가지고 왔다. 특히 까슬까슬한 인조 속옷들은 내가 한국에 살 때 사드린 것이다. 유난히도 더위를 타는 나는, 내 것을 사며 어머니 것도 선물해 드렸다. 샌디에이고에 이사 온 후 수년간 한동안은 선선한 여름이라서 나는 이런 속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기온과 공해로 지구가 뜨거워지며 이곳도 한국처럼 끈적거리는 여름 날씨로 변해버렸다.

 

어머니가 세상 떠난 지 거의 스무 해가 되어간다.

 

어머니는 시댁인 순천에서 공산당들의 거짓선동과 잔인한 짓을 똑똑히 보았다며 자녀인 우리에게 철저히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쳐주셨다. 또 정의롭고 양심 있는 사람이 되라며 늘 강조하셨고, 흐르는 강물도 아끼라던 분이었다. 머리에 쓰는 우리들 모자도 발아래 두지 말라며 귀하게 간수하라고 가르치셨다. 또 밤늦게 공부하는 내 곁에서 뜨개질하시거나 책을 읽으셨다. 내가 질문하면 백과사전처럼 척척 대답해주시던 나의 어머니.

 

와병의 아버지가 별세 한 후 집안이 기울자 이민 간 자식 곁으로 가 살아보겠다며 고국을 떠나셨다. 하지만 시골학교에 근무하는 내가 걱정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셨기에 우린 단칸방에서 소꿉놀이하듯 살았다. 당시 회갑을 맞은 어머니는 모교인 동창 회관에서 친지와 후배들을 초청해 대접하셨다. 그날 밤, 행복했던 어머니의 얼굴과 말씀을 난 잊을 수 없다.

 

또 우리 가족이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노인아파트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수술실에서 회복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온 가족이 간호했던 일. 팔순 후엔 차츰 기억이 나빠져 가끔은 억지 말로 나를 울리기도 했지만 이제 모두 그리움이다. 누구나 아무리 효도를 한다 한들 어찌 부모님의 사랑을 되갚을 수가 있을까. 우리가 즐겨 부르던 동요의 가사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집안마다 모양은 달라도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머무시던 방에서 그분의 낡은 여름 속옷을 입은 나는 마냥 행복하다. 또 할머니와 정을 꽤 나눈 내 딸과 맞장구치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살아오며 나는 평생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지만, 요즈음은 아침에 깨어나면 부모님의 은혜가 절절하여 두 손을 모아 합장한다. 언제까지 내가 이런 아름다운 시간을 간직할지 모르겠지만, 그처럼 상쾌하게 새날을 맞이한다. 나는 돌아가신 기일보다는 서양의 문화처럼 어머님의 생신 날을 잊지 않고 생전에 보여주신 교훈들을 생각하며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다음 생애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던 어머니, ~ 그립고 또 뵙고 싶어라.

(미주중앙일보 ' 이아침에' 컬럼  2018726일 목요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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