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어머니들

2018.08.10 18:44

김창영 조회 수:5

영등포 어머니들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창영

 

 

 

 

 아내는 순흥 안승정공(順興 安承貞公) 24녀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장인어른께서는 일제강점기 때 남원향교 직원으로 계셨기에 택호도 직원댁으로 호칭되었다. 4대 봉사를 하는 종가집이기에 일 년에 제사를 9번 모시는 집안이다. 제사 때마다 가묘(家廟)에 모셔둔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전통적인 유교사상 집안이어서 근동은 물론 남원고을에서도 숭앙의 대상이었다. 나는 신접살이를 부치면서 낙수정 골짜기에 방 한 칸을 얻어 차면 정도로 칸막이를 하고 아내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동생을 불러내려 J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다행히 입학성적이 좋아 특별반에 편성되어 기뻤다. 아내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수용해주어서 고마웠다.

 아내는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듯했다.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으니 내가 취직할 때보다 더 기뻤다. 아내는 시동생 학비를 대느라고 허리가 휘었을 터인데 봉급생활 7년 만에 비록 오막살이지만 내 집을 마련했다. 아내는 있을 때 아껴서 긴요할 때 쓰는 성품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집을 팔고 사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지금의 전주시청 부근에 대지 60평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옛 전주역 부근이어서 여수에서 올라온 열차에서는 은갈치장사가, 군산에서 온 열차에서는 생조기 장사가 들르니 시장에 갈 필요도 없이 편리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1년 뒤 진북동의 공무원주택을 인수하게 되어 1가구 2 주택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1982년에 막내가 서울대학교 인문사회계열에 합격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뻐했다.

 큰아들이 원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제일은행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서울로 발령을 받고, 둘째는 우석대학교 수학과를 4년간 장학금으로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전자계산기학과 3학년에 학사편입을 하여 3형제가 서울생활을 하게 되어, 지하철 신천역 부근에 15평짜리 연탄아파트를 전세내어 198532일에 서울살림을 하고 나는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막내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4학년 1학기까지 장학금으로 마치고 졸업 1학기를 남긴 상태에서 198572일에 구속되었다. 사연은 당시 대우어패럴 10대 여공들이 단 돈 100원을 올려라고 농성하니 회사에서는 구사대를 조직하여 단전 단수를 하고 압박하니 여공들은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 때 서울대생 만으로 구성된 20여 명이 빵과 음료를 갖고 농성장에 침입한 죄로 구사대로 부터 각목세례를 받고 전원 구속되어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고, 학교는 제적되었다. 제적소식을 듣고 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수감된 학생은 가족이 아니면 면회가 되지 않으니 아내는 매일 구치소로 면회하러 다녔다. 5분의 면회시간을 위해서 한나절을 소모했다.

 남부지원에서 학생들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어머니들이 너나할 것 없이 남부지원으로 몰려가 어깨띠를 두르고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농성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아내의 사진이 클로즈업 되어 동아일보에 게재되기도 했다. 형을 받고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되어 형을 마치고 출소하여 인천에 있는 승마용품 제조공장에 학생 신분을 속이고 취직을 하였다. 그러나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망이 좁혀오자 탈출하여 수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250만 원의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명단에도 올랐다. 수배생활 1년 만에 담당형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담당형사란 교내생활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친구 아닌 친구였다. 식당으로 가면 식당으로, 도서관으로 가면 도서관으로, 심지어 강의실까지 들어와 강의를 듣기도 했다.

 수배생활 때 아내의 마음고생이 컸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형사들은 살고 있는 아파트 지하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아내의 거동을 밀착 감시했다고 한다. 어느 여름에 한 번은 시장에 갔다가 시장바구니가 무거워서 옆에 있는 청년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청년이 바로 형사였다고 한다. 감시할 것을 예상하했지만 그렇게 밀착감시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막내는 수배 도피 중 다시 붙잡혀 인천교도소에 재수감되었다.

 인천교도소는 다니기에 불편이 많았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주암역에서 내려 또 버스를 갈아타고 버스에서 내려 한참 걸어야 교도소에 갈 수 있으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렇게 1년 동안 인천교도소를 다녔으니 이런 정성으로 사업에 힘을 들였다면 사업이 번창했을 것이다.

 아내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 연세대학교를 방문했으며, 행방불명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생 안치웅의 23년만의 장례식에도 다녀왔다. 막내와 같이 감옥생활을 한 대학동기 안치웅 군의 부모는 23년간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당국이 인정했기에 관속에 성경책 한 권을 넣고 시신 없는 장례식을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했었다.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되어 수감된 모든 학생이 석방되자 자연스럽게 영등포 어머니모임이 이루어졌다. 영등포어머니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학생의 어머니들을 지칭한다. 어머니들의 이름은 모르고 ○○○학생 어머니로 통한다. 구치소 면회를  갔다가 사귄 친구이기 때문에 어느 모임보다 결속력이 강하여 모임이 잘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모이다가 경주불국사, 온양온천, 남해 사는 어머니의 초청으로 남해 유람선 놀이까지 하게 되었다. 이제는 30년이 지나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가 세 분이나 생기고, 모두 팔순이 넘어 거동이 불편하여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막내아들 김성주는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영등포 어머니들을 국회의원회관으로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면서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었다. 나는 평범한 아내요 어머니로 살다가 아들 딸을 감옥에 보내고 난 뒤 투사가 된 이 영등포 어머니들을 당당한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다.

(2018.8.10.)

 



crane43%40daum.net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7 탁영금 김길남 2018.08.13 7
106 폭염 속 텃밭 풍경 신효선 2018.08.12 6
105 三戒 두루미 2018.08.11 7
104 더 좋더라 김학 2018.08.11 7
» 영등포 어머니들 김창영 2018.08.10 5
102 새로운 도전 전용창 2018.08.09 62
101 뛰어다니는 이름 최연수 2018.08.09 61
100 [김학 행복통장(67)] 김학 2018.08.08 56
99 자동차 운전 최은우 2018.08.08 58
98 백일홍 백승훈 2018.08.07 55
97 칠연계곡의 3박4일 변명옥 2018.08.06 57
96 낙엽아, 나는 너를 안단다 김창임 2018.08.06 27
95 마음이 있어도 못 보았네 정석곤 2018.08.05 59
94 교직생활에서 지우고 싶은 이야기 고안상 2018.08.05 67
93 밭 한 뙈기 소종숙 2018.08.05 48
92 친구가 좋아 김금례 2018.08.04 44
91 꼭, 그녀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김창임 2018.08.04 75
90 우리 몸의 신비한 비밀 두루미 2018.08.04 52
89 울릉도 탐방기 신효선 2018.08.02 89
88 수필은 백인백색 [1] 전용창 2018.08.02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