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정전

2018.08.15 15:32

김학 조회 수:5

폭염과 정전(停電)

김 학

2018년 여름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무덥다. 연일 섭씨 40도 근처를 맴돈다.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간다는 8월 10일 금요일, 오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우리 아파트에 정전이 예고되어 있다. 이 더위에 정전이라니,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 무더위에 어디로 가서 피서를 한단 말인가?

며칠 전부터 국민은행에서 내 스마트폰으로 ‘국민카드 소멸예정인 포인트리597점을 9월 30일까지 사용하라’는 문자메시지가 왔었다. 그래서 국민은행인후지점 VIP실로 갔더니, VIP팀장은 현금 17,835원을 일반통장에 넣어주었다. 공돈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 VIP실에서 무더위 쉼터로 나와서 지방신문과 두 가지 중앙지를 뒤적거려도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개의 텔레비전에서는 서로 다른 화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오래 내 눈길을 붙잡지는 못했다. 다만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서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집에서 나온 김에 동네서점에 들렀다. 98세 김형석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백 살까지 살아보니』를 사려고 했더니 없다기에 주문을 하고 서점 밖으로 나오니, 숨이 컥컥 막혔다. 마치 모닥불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날씨가 무더운 날이면 가까운 은행지점으로 피서를 간다는 이야기가 허튼 소리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우리 동네엔 국민은행과 전북은행, 농협, 신협, 새마을금고가 있으니, 눈치를 보지 않고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피서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어떤 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가까운 도서관으로 피서를 간다고 자랑하더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실컷 독서도 하고 피서도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서울 잠실에 사는 외손자 안병현이는 중학교 2학년인데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가까운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하다가 자정쯤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다더니 참으로 바람직한 여름나기로구나 싶었다. 도서관 가까운 곳에 사는 이점을 잘 살리는 것 같았다.

은행과 서점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니 날씨가 무척 후텁지근했다. 정전 중이니 선풍기도 에어컨도 쓸모가 없었다. 오랜만에 부채로 더위를 견디려니 옛날 시골에 살던 추억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였으니, 선풍기나 에어컨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부채가 유일한 피서도구였다. 부잣집은 식구 수대로 부채가 있어서 호사를 누릴 수도 있었다. 부채는 바람으로 더위도 견디고, 모기도 쫓으며, 햇살도 가릴 수 있는 여름의 필수 도구다. 그 부채로도 견딜 수 없으면 어머니는 나를 우물가로 데리고 가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등에 부어주면 그 등목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그러고 나서 대청에서 큰대자로 누워 부채질을 하면 신선이 따로 없었다. 선선하여 금세 낮잠이 들곤 했었다.

우리 집 텔레비전과 냉장고도 편히 쉬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그런 전자제품은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냉장고에 보관중인 음식이 변질되지나 않을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오늘의 정전 때문에 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올여름은 111년만의 더위’라고 신문이나 방송은 날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한낮에 외출을 하지 않고 내 서재로 들어와서 에어컨과 선풍기를 함께 켜놓으면 천국이 다로 없었다. 이 서재에서 컴퓨터로 글도 쓰고, 인터넷검색도 하며, 신문이나 책도 읽고, 라디오도 들을 수 있으니 나의 서재는 여름나기에 좋은 다목적 피서지가 아닐 수 없다. 주방에서 더위와 싸우며 음식을 조리하던 아내도 슬며시 내 서재로 들어와 더위를 식히곤 한다. 아무리 폭염이 기승을 부려도 전기만 들어오면 이 서재에서 피서를 즐길 수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올여름이 무덥다고 언론이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날마다 팥빙수를 사먹으니 요즘 내 입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 푹푹 찌는 무더위를 이기려면 이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처럼 ‘아이스케이크’ ‘얼음과자’를 외치며 동네를 누비던 얼음과자 장사를 만날 수는 없어도, 팥빙수는 동네 유명 제과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눈과 입이 즐거운 팥빙수는 여름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여름의 별미(別味)다. 구름처럼 가볍고 솜털처럼 보드라운 팥빙수가 혀끝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서 입속에서부터 온몸으로 시원함이 번진다. 숟가락으로 팥빙수를 떠먹으면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름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날마다 팥빙수를 한 개씩 사다주는 아내는 가계부에 적자가 나겠다면서 엄살이지만, 그래도 몇 숟갈 얻어먹는 재미에 매몰차게 중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 나는 속으로 ‘더위야, 고맙다’라고 감사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18.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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