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생

2018.09.21 17:53

한성덕 조회 수:7

하숙생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나는 지금 60대 중반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이 몰락하여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그 때문에 ‘하숙생’은 그림의 떡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한 뼘 거리에 학교가 있었고, 중학교 때는 큰 고개 작은 고개를 각각 두 개씩 오르내리면서 30(12km)를 걸어서 다녔다. 그리고 무주에서는 고등학교 3년과 교육청에서 근무하던 3년 동안 ‘자취’를 했다. 초등학교 때 불어닥친 가난이 나에게 하숙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취생활을 할 때도 쌀 한 톨 섞이지 않는 밥을 지어먹었다. 꽁보리쌀로 밥을 짓는 괴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보리쌀을 빵으로 바꾸거나 국수를 끓여먹는 것이 다반사였을까? 가뭄에 콩나듯 더러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동생과 함께 자취를 했는데, 라면조차 사먹기 어려워 우리는 라면을 ‘황제라면’이라고 칭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1960년대 후반이던 그 시절, 대중가요 최희준의 ‘하숙생’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노래를 잘 부르고, 운동을 좋아하며, 그림그리기와 글씨를 잘 쓰는 재주가 있었다. 그 실력은 군대로 이어지면서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대중가요는 철저히 배격했다. 유행가는 ‘세속적인 노래’요, 그런 노래자체를 ‘죄’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생활반경은 집과 학교와 교회였다. 그런 모범(?)생이 유행가를 부르겠는가? 의도적으로 대중가요를 멀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희준의 ‘하숙생’이 내 인생에서 노래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참 아이러니(irony)한 일이다. 그 같은 생각이 지극히 패쇄적이고 편협적이었으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철부지였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비좁은 자취방보다 드넓은 예배당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다. 공부하고 풍금을 치면서 노래하는 게 그리도 좋았다. 산 밑에 있는 자취방에서 읍내를 지나 교회까지의 시간은 20분쯤 되었다. 그 거리 안에 두 곳의 전파사가 있었는데, 지날 때마다 ‘하숙생’이란 노래가 고막을 때렸다. 레코드를 틀어주는 건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려주는 건지, 좋든 싫든 들으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외면하던 유행가에 귀가 솔깃하고 점점 좋아지는 게 아닌가? ‘하숙생’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에 빠져드는 게 참 신기했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믿어지지 않았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가사가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자신을 돌아보며 묵상케 하고, 철학적인 요소가 묻어나 ‘인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유행가는 관심이 없어 배우기는커녕 부르지도 않았지만, 이 노래는 가사에 매료돼 인생의 맛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래서 ‘하숙생’이란 노래를 배웠다. 아니 저절로 익혀졌다고 해야 맞다. 이 노래가 내 인생의 단골 메뉴가 된 사유다.

  ‘최희준’ 씨는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암울하던 1960년대 초반에서 밝고 경쾌한 노래,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불러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뒤이어 ‘하숙생’이 등장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 가수’라는 게 썩 어울리진 않아도, 이 노래를 통해서 진한 여운을 남기는 가수였다. 핸섬한 몸매에서 차오르는 노래,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 구수하게 들리는 저음, 웃을랑말랑하는 미소, 작은 눈에서 번져나간 눈웃음이 얼굴 전체로 번지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분 나름의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가수 ‘최희준’씨가 명망가의 대열에 들게 된 것은 작곡가 ‘손석우’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여정도 달라진다.’ 하지 않던가? 그 만남에서 작곡자 손석우 씨는, 최성준에게 ‘최희준’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다. ‘항상 웃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이름처럼 언제나 엷은 미소를 띠고 노래해 일반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노래하던 최희준 씨, 서울대 법대 출신 1호 가수, ‘찐빵’으로 불릴 만큼 친근한 이미지, 재즈를 기반으로 한 세련된 창법, “노래의 가사처럼 살다보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하던 그 분도 인생 여든 둘에 하늘나라로 갔다.  

  최희준 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벌거숭이’라는 것과 ‘하숙생’이란 점을 일러주었다. 몰라서가 아니라 깨닫고 살라는 뜻이리라. 정일랑, 미련일랑 두지말자고 노래했으나 정도 미련도 흠뻑 주고 떠난 사람이다. 아주 멋지게 살다 간 팔순의 최희준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2018.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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