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목소리

2018.11.13 04:30

김성은 조회 수:9

분홍색 목소리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분홍색 목소리와 소주를 한 잔 마셨다. 얼큰한 전골요리를 안주로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담소는 편안했다. 동네 친구가 없는 나에게 분홍색 목소리는 참 좋은 이웃이요, 동료다.

 분홍색 목소리에는 꼭지점이 없다. 둥그런 원처럼 누구와도 매끄럽게 어울린다.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속은 무르지 않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집념도 있다. 상대의 연배가 높든 아니든 자연스럽게 경어를 쓰고, 떼묻지 않은 태도로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일까? 분홍색 목소리의 대인 관계는 매우 원만하다.

 

  분홍색 목소리의 임무는 시각장애 교사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근로지원이다. 우리 학교에는 나를 포함하여 총 다섯 분의 시각장애 교사가 일하고 있다. 근로지원인 두 분의 도움을 받는 우리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A팀과 B팀으로 그룹을 정해 놓고 작업을 수행한다.

 얼마 전 B팀 교사와 근로지원인 사이에서 몇 달 동안 묵은 감정 문제가 공론화되어 회의를 연 일이 있었다. 나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지만, C교사와 D지원인은 이미 감정적으로 꽤나 격해진 상황이었고, 당사자들은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고 있었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분노의 화살은 서로를 향했고, 그대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홍색 목소리는 이 때도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결코 흥분하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근로지원인 측의 입장을 정확히 피력했다. 자분자분한 어투는 상냥했지만, 힘이 있었고, 조리있는 논리에는 설득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나에게 '목소리'는 그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교양은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의식이나 가치관을 반영한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상대의 목소리와 어투에 유난히 민감한지도 모르겠다. 분홍색 목소리와 함께 일하며 나는 부드러운 어투의 놀라운 힘을 알았다. 이솝 우화 속 나그네의 겉옷을 벗게 한 것이 햇볕이었던가?

 문득 가시 돋친 나의 사나운 어투를 반성했다.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나는 친절은커녕 상대방을 맥빠지게 하는 무뚝뚝한 아내요, 딸이었다.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내 분이 풀릴 때까지 미련하게 혼자 삭히는 방식으로 불쾌한 감정을 처리했다.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정중하고도 차분한 대화를 주도할 줄 아는 분홍색 목소리는 나에게 더없이 큰 스승이다.

  빈말을 일삼으며, 가십거리에 열을 올리는 사람의 말은 비누 거품 같다. 깊이 없이 약속을 남발하고, 아첨이나 아부를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비누 거품처럼, 허공을 맴도는 말에는 의미도, 무게도 없다.

 신중하고 따뜻한 언어에 분홍색을 칠해보자.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심은 그 자체가 치유다.

 근로지원 선생님은 나에게 분홍색 마음과 시간을 선물해 주셨다. 전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요란하지 않게, 화려하지 않게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상대방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참고 참다가 임계점에 다달아서야 거칠게 감정의 파편을 쏟고 마는 내 오랜 습관을 고쳐 보리라.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내가 불편했던 지점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냉철함을 훈련해 보기로 다짐했다.

  감정의 동요가 어투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하수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유연함과 침착함을 내 목소리에도 담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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