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 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1993년 2월 25일, YS가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취임연설의 한 부분이다. 11월 22일은
YS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 3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 3주기에 즈음하여 YS에 얽힌 이런저런 추억과 이 나라 민주주의에 남긴 업적이
새롭다.
드디어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아마도 1993년 8월 10일 무렵이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그때가 나의 여름휴가 기간이었지만, 한가롭게 휴가를
떠나기가 무엇해서 사무실에 나가 있는데 대통령으로부터 올라오라는 호출이 왔다. 내용인즉 금융실명제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실시하려 하는데,
실무진이 작성한 담화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완전히 새로 써 오라는 것이었다.
사안이 엄중하다 보니 관계 장관과 김용진
세제실장을 비롯한 실무진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게 과천의 한 아파트에서 이 작업은 진행되었다. 나도 대통령으로부터 실무진이 작성한 담화문 초안과
긴급명령안을 받아 보고서야 비로소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초안을 참고로 하여 긴급히 대통령 담화문을 작성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30분,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이 대통령의 담화로 발표되었는데, 담화문의 발표와 동시에 효력이
발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8시부터 은행, 증권, 보험, 우체국, 새마을금고 등의 모든 예·적금 통장과 주식, 자기앞수표,
양도성예금증서, 채권발행의 이자지급과 상환은 반드시 실명으로만 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담화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가 없습니다. 금융실명거래의 정착이 없이는 이 땅에 진정한 분배 정의를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 금융실명제는 개혁 중의 개혁이요,
우리 시대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입니다.”
YS의 개혁은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와 바로 그날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의 개방을 지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27일, 처음 열린 국무회의에서 자신과 직계가족의 재산을 공개하였고, 3월 4일에는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칼국수’
오찬석상에서 “대통령 당선 이후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단돈 1원을 받지 않았다. 나는 내 임기 동안 그 누구로부터도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돈을
받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적어도 YS 자신만은 끝까지 이 약속을 지켰다고 믿는다.
질풍노도와 같이 진행된 문민 개혁
YS의 문민개혁은 그 자신이 즐겨 썼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의 호연지기로 전광석화와 같이 이루어졌다. 3월 8일,
권영해 국방장관과의 조찬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의 교체 의사를 통보하고, 곧바로 인선에 착수, 후임자를 청와대로 불러 임명절차를 마친
뒤, 돌아가 즉시 취임식을 갖도록 지시했다. 이야기를 꺼낸 지 4시간 5분 만에 인사조치가 완결된 것이다.
5월 24일에는
12·12사태에 관련된 고위장성의 예편조치를 단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5.24 숙군’이라는 것이다. 하나회 회원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일부의 군복을 벗긴 것이다. 이는 군정종식과 하나회 척결을 향한 발빠른 행보로 YS가 취임하고 석 달 만에 군복을 벗은 장군이
18명이었고, 떨어진 별이 50개였다. 정치군인의 지배하에 있던 군(軍)을 국민의 군대로 바꾸고, 30년 군사정치 문화를 청산한 것이다.
1995년 12월에는 ‘헌정질서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학살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전범을 보여준 것이다.
4·19를 민주혁명으로 분명히 자리매김하고(1993.7.4),
4·19묘역을 국립묘지, 민주성지로 성역화(1995.4)하였으며, 4·19 희생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게 했으며(1995.7), 문민정부가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밝히고(1993.5.13), 5·18을 국가기념일로 정하고, 5·18묘역을 성역화함으로써 한국의 현대사를 바로
세웠다.
한국 민주주의의 긴 도정에서 YS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앞장서 민주화를 쟁취해
냈고, 마침내 지방자치의 전면실시로 그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결하고 정착시켰으며, 군사 쿠데타 등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과 장애를 제거해 준
한국 민주주의의 거산(巨山)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그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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