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2018.12.15 05:57

한성덕 조회 수:9

마중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서 맞이하는 것을 ‘마중’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자녀가 오거나, 여행 셨던 부모님이 돌아오시거나, 설렘으로 기다리던 애인이 올 때 들뜬 마음으로 ‘마중’을 나간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대전에서 목회하시던 아버지가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가정이 몰락하자 목회마저 접으셨다. 그 전까지는 고향인 무주 할머니댁에서 학교에 다녔으며, 방학하는 날 할아버지 손을 잡고 부모님에게로 갔었다. 아버지는 대전역까지 ‘마중’을 나와 반기며 덥석 안아주셨다.    

  아버지가 시무하시던 교회는 대전의 변두리 언덕배기 교회서부터 그 아래로 길이 쭉 뻗어있었다. 큰아들이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음식을 장만해놓고 몇 번이나 문밖으로 나와 서성거렸던가 보다. 언덕 아래서 올라오는 나를 보시면 기다리지 않고 부리나케 내려오셨다. 나를 안으시기 전에 양 볼을 토닥거리고, 옷맵시를 쓸어내리며 어쩔 줄 몰라하셨다.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도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마중 모습이 어젯일처럼 눈에 선하다.    

  경기(驚氣) 때문에 세 자녀를 잃으신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나 역시 몸이 허약해서 자주 놀라곤 했다. 경기(驚氣)가 들어서고 눈이 뒤집히면 희한한 것이 나타나 나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 하얀 눈동자를 드러내고, 허공으로 손을 내저으며, 숨을 몰아쉬면서 그토록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런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어머니 앞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기쁘셨을까? 대들보 같은 자식의 건강한 모습이 꿈이냐 생시냐 싶으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목회를 접은 탓으로, 5학년 때부터 어머니는 양은그릇 행상에 나섰다. 기울어진 가정을 끌어안고 억척스럽게 살아보려는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시는 행상이기에, 이제는 목회자의 아내가 아니라 그릇을 파는 행상아줌마였다. 아침에 나가시면 사람들이 일터에서 돌아와야 만날 수 있다며 늦은 밤에 오셨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손전등을 비추며 마중을 나가곤 했었다. 이때부터 마중이 내 안에 들어와 즐거움으로 출렁거렸다. 마중 안에 평안이 일렁이고, 행복이 넘실거리며, 어머니의 향긋한 젖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곤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마중’이다.

  이제, 그 좋은 마중도 끝이 나나보다. 마중을 나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시골집에 간다 해도 마중 나올 부모님이 안 계신다. 아버지는 5~6년 전에 천국으로 가셨고, 95세가 다 되신 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주간에만 다니셨으나 원장이하 모든 요양보호사들의 친절에 홀딱 반하셨다. 이에 더하여, 간식과 끼니때마다 각기 다른 찬거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고야 말았다. 요양원에서 아름아름 알게 된 어르신들과의 사귐은 더 할 나위없는 놀이 공간이었다.      

  어머니를 집에 모시려고 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며 절대로 마다하셨다. 요양원이라도 가기를 원해서 넌지시 얘기를 꺼내면 펄쩍 뛰셨다. 끼니를 제대로 안 드시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고, 시골에 갈 때마다 근심이 쌓였다. 더 큰 걱정은, 모든 냄비가 까맣게 타버려서 금방 터질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단순하게 기도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양원의 주간 보호센터에 다녀오시더니 퍽 맘에 들어하셨다. 결국은 조용히 요양원에 안착하셨다.  

 

  시골집의 너른 울안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많다. 소나무에게 마중 나오라고 소리쳐본들, 마중을 핑계 삼아 배롱나무를 발로 걷어차 본들, 텔레비전에게 ‘너만큼은 말을 잘 하니까 마중 나와야 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추억이 되었을 뿐이다. 부모님이 계시던 집엔 고요가 흐르고, 싸늘한 분위기에 지친 쓸쓸함은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이스라엘의 왕 사울에게서 느껴보았다. 사울은 1대왕이요, 다윗은 2대였다. 다윗이 사울 왕 밑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두 용사는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감격에 젖어 당당하게 나란히 입성하고 있었다. 여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마중’을 나왔다. 열렬히 환영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외쳤다. 왕이 얼마나 불쾌했을까? 노발대발한 것은 물론이요,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정황상, 이미 사울의 ‘쓸쓸함과 적막감’은 온몸을 둘둘 감고 뼛속 깊게 파고들었다. 결국은 ‘마중’의 산물이요, 그 ‘싸늘함과 적막감’이 요즈음 내가 느끼는 ‘마중’이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아비와 어미가 되었다. 두 여식이 결혼하자 신랑과 함께 나란히 우리에게 올 때가 있다. 내 부모님이 마중을 나오지 않으신다고 투덜거릴 것도, 마중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안주할 것도 아니다. 내게 주어진 자식들에게 마중 나갈 여지가 있고, 마중 나올 두 여식이 있으니 말이다. 외손자가 생기면 그들의 손을 잡고 더 큰 기쁨으로 마중 나올 게 아닌가?

  나는 고작해야 두메산골의 작은 집이나 전주에서 마중을 가거나 준비했다. 그러나 큰딸은 인천공항으로, 작은 딸은 제주도로 발령 받은 신랑을 따라갔으니 광주공항으로 마중을 나가야 할 판이다. 어쩌다 비행기를 타고 딸들에게 가면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다. 딸 가진 부모의 특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처럼 돌고 도는 게 인생인 것을 요즈음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러므로 ‘가는 세월 탓하지 말고 오는 세월 잘 잡아야 하며, 가는 것을 아쉬워하기 전에 오는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나름의 이런 사상이 ‘마중’을 통해서 내 안에 새롭게 들어왔다. 그리고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마중’은 더 크게 일렁이고 있다.

  실은, 기독교 신자들이 ‘마중’에 대하여 큰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다. 세상 종말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큰 마중’이라고 부른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종말의 ‘마중’이라서 그렇다.

  장차 공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주님은 우리를 맞이하려는 ‘마중’이고, 우리는 주님을 뵈려고 하는 ‘마중’이다. 세상 마지막에 이루어질 아주 ‘큰 마중’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슴이 일렁일 만큼 기다려지는 ‘마중’이기도 하다.

                                                        (2018.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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