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자이고 싶다

2019.02.13 05:01

정남숙 조회 수:8

나도 여자이고 싶다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남자인 듯 남자 같은 나는 분명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나도 여자다운 여자이고 싶다. 누군가 나를 남자로 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너무나 꾸미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나도 여자이고 싶다'는 작은 욕심조차 내세우지 않은 것 같다. 여자 남자의 역할을 분별하지 않고 내 멋대로, 나의 정체성을 잊고 살아온 것뿐이다.

 

  내 환갑과 큰손녀 돌잔치가 연이어 겹치게 생겼다. 내 생일과 큰손녀 생일은 5일 간격이기 때문에 나는 내 환갑을 양보하고 손녀 돌잔치를 대신했었다. 그것도 음력 섣달 하순이기 때문에 설날이 곧이어 다가오고 있어서 가급적이면 내 생일을 찾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번 설에도 나는 역귀성을 하기로 하고, 내 생일이 지난 후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큰손녀 생일에 맞춰 일찍 서울에 올라갔다. 손녀생일 다음날 작은며느리와 큰손녀는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며칠 전, 목 주위와 얼굴에 번지고 있는 잡티를 제거하는 시술을 받았는데, 시술결과도 보고 추가제거도 할 것이라며 제 큰딸을 데리고 병원엘 다녀왔었다.

 

  “어머니, 우리도 병원가요.

큰며느리는 다짜고짜 병원에 가자고 했다. 작은아들 집에 4~5일 머물다가 큰아들 집으로 갔다. 큰며느리와 얘기를 나누던 중, 작은며느리 얼굴 잡티 제거하느라 병원 다녀오더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원에 가자고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너도 얼굴에 뭐 났니?” 하고 물었다. 제 얼굴은 아무것도 없고 깨끗한 피부란다. 그런데 작은 며느리가 나에게 같이 가자하지 않은 것에 화를 낸 것 같다. 내 얼굴 양쪽에 두덕두덕 가득 끼어있는 검버섯과 검은 점들이 있는 것을 보고도 제 모녀만 갔다는 것에 내가 속상해 할까봐 나를 위로하며 가자고 한 것이다. 비싼 미용실에 가서 파마도 하자고 했다. 극구 사양하며 며느리를 달래놓고, 화장실 가는 척하며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니, 나도 여자인데 이러고 살았구나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 것 같다. 선생님이 모자라서인지 교감선생님이 임시로 우리 반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다. 산수시간에 구구단을 배우는데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무도 손들고 일어나 외우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묻는 선생님 소리에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호기롭게 구구단을 단숨에 전부 외워버렸다.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며 내 이름을 물으셨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랑하듯 교실을 한 바퀴 휘돌아보며, 내 이름을 큰소리로 대답하고 앉았는데 아이들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 못했나? 너무 잘난 척 뽐냈는지, 아니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조금 전, 교감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 생각났다. 내 이름을 큰소리로 말하고 난 직후, 교감선생님은 나를 바라보시며 ‘넌 여자앤데 이름은 남자이름이구나’ 하셨던 것이다. 아이들이 웃던 이유도 이름 때문인 것을 알고, 그 이후로는 내 이름을 큰소리로 자랑스럽게 불러본 적이 없다. 내 이름에는 남자가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내 이름에는 죄가 없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우리 10남매의 이름을, 제일 맏이인 큰오빠의 이름에 남자들은 항렬을 따라 맨 끝 자를 따랐고, 여자들은 가운데 자를 따라 지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교감선생님이 싫었다. 복도에서 만나면 피해버렸다. 빨리 새 선생님이 오셔서 교감선생님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고민을 아신 아버지는, 교감선생님 이름이 남자인데 ‘김형숙. 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인자하고 자상한 내 남편은 하루면 열두 번씩 나를 부른다. 무슨 일이건 남자인 자기가 과감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내 의견을 묻는다. 내가 앞에서 헤쳐 나가주기를 바랐다. 안동 권씨 양반 체면에, 큰소리 나는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앞에 나서지 않는다. 나를 여자로 보지 않고 자기와 동성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무슨 옷을 입든지 예쁘다 말 한 번 해주지 않았고, 미용실에 다녀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도 여잔데 남편으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예쁘게 꾸미고, 고운 옷을 입어도 그저 무관심 상태였다. 남편은 두 아들 앞에서 얇은 잠옷도 안 입었으면 했다. 처음엔 섭섭했다. 그러나 나는 곧장 여자이기를 포기했다, 남자형제 넷이 함께 자란 남편은, 여자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에는 남자만 넷이 살고 있다 해도 남편은 그렇거니 했다.

 

  큰아들 결혼이 이뤄지고 있었다. 새 며느리 패물을 장만하려고 예비 큰며느리와 같이 보석상에 들렀다. 루비, 다이아. 사파이어, 순금세트를 고르는데 며느리는 귀를 뚫지 않고 있어 귀걸이가 문제였다. 시어미인 내가 귀를 뚫으면 새아기 자기도 귀를 뚫겠다고 했다. 나는 아애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살았으니, 귀 뚫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가지고 있던 보석들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가끔 보석함을 열어 만져보고 그대로 간직하고 한 번도 착용해보지 않았는데, 새 며느리의 귀걸이 때문에 귀를 뚫을 기회에 봉착하여 뚫을까 말까 잠시 고민도 해 보았으나, 어렵사리 후회 없이 위기를 넘기고 말았다. 그러니 나는 지금까지 보석을 세트로 착용해 본 적이 없는 남자 같은 여자로 살았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참 서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내 친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앞에 아주머니 한 분이 있어 화장실 방향을 물었다고 한다. 신을 다 신고 일어서서 재차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어 자세히 보니, 앞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기와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럴 것 같았다. 거울 속 나는 내가 아니었다. 늙고 초라한 늙은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쪼글쪼글 주름투성이에, 희지도 검지도 않은 수세미같이 흐트러진 머리칼, 엄지손톱만한 검버섯이 얼굴을 온통 덮고 있어, 누가 봐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흉측스럽고, 고약하게 생긴 노인네가 있을 뿐이었다. 나도 곱게 늙은 여자이고 싶었는데!  

 

  나도 주름개선제를 발라 주름을 커버해 볼까? 검버섯도 제거하며 날마다 화장도 해봐야지. 이제라도 여자답게 꾸미고 멋있게 살아야지, 나도 여잔데. 나도 여자이고 싶었다. 유학 간 손자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공상에 잠겨보았다. 그러나 허무한 망상이었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얼굴에 맞는 화장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화장품을 한 번도 세트로 사 본 적이 없다. 발라본 적도 없다. 바르는 순서도 모른다. 또한 여자 흉내를 내려 해도 부지런해야 하는데 나는 원래 게으르다. 그리고 내 아들과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내가 어떻게 생겼든 나를 자랑스러워한다. 무엇을 하던 최고라 한다. 그러니 나는 남자같이 생긴 여자일지라도 겁날 것이 없다.  

 

 작은며느리가 잡티 제거하러 같이 가자고 했어도 따라나설 내가 아님을 알고 있어 말하지 않았을 테니 서운해 할 것도 없다. 또한 나도 모르는 섭섭함이 있었다할지라도 큰며느리가 대신 나를 위로해 주었으니 미련도 없다. “잡티 제거하러 병원가자”, “미용실에 가서 파마” 하자, 서둘러 주는 딸 없는 시어미인 나는 행복 그 이상이다. '나도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을 잠간이라도 갖게 한, 두 며느리에게 도리어 대접을 받은 것 같아 고맙기도 하다.

                                                                       (2019.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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