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스타일

2019.02.17 16:13

정남숙 조회 수:3

모던(modern) 스타일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백년만의 폭염이라는 지난여름의 기상이변은, 올 겨울날씨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 겨울의 특징인 ‘삼한사온(三寒四溫)’은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도 없고, 저승사자보다 무섭다며 위세등등했던 동장군(冬將軍)조차 종적을 찾을 길 없어진지 오래다. 요즈음 학생들은 삼한사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설을 앞두고 역귀성을 서두르며 포근한 겨울날씨에 옷차림이 신경이 쓰였다. 하루이틀 아닌, 2~3주 머물 예정으로 떠나는 서울나들이라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입을까, 가볍게 오버코트를 입을까 망설이며 작은방과 안방을 들락거려보았다.  

 

  안방장롱을 열었다 닫으려는 순간, 내 눈길을 붙드는 곳이 있었다. 걸려있는 옷 사이에 묵은 손가방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서울에서 내가 활동하던 역사가 담긴 핸드백들이다. 필요도 했지만 친구가 구매하니 덩달아 산 것도 많다. 최고 명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들으면 알 수 있는 중저가의 것들이다. 한두 번 쓰기도 했지만 남들에게 주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채, 크고 작은 핸드백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나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다. 사실 요 몇 해 동안 며느리들이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손가방들을 자주 사 주는 바람에 장롱 속에 넣어둔 10여 개의 핸드백은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포장지도 뜯지 않은 새것도 섞여 있었다. 아니 이것은, 7년 전 아이들이 내 칠순기념으로 사다준 명품 핸드백이데 포장지도 뜯기지 않은 채,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노인이 귀하던 시절에는 자식들이 부모 환갑잔치를 차려주었는데, 요즘엔 환갑잔치를 부모들이 차려준다는 말이 있다. 아예 환갑잔치를 차려주는 사람도 없다. 내 환갑도 큰손녀 돌잔치가 5일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말도 못하게 말렸더니, 칠순기념으로 가족들이 말레이시아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사준 것이다. 그러나 정장스타일 나들이에 어울릴 만한 명품핸드백을 굳이 들고 다닐 기회가 없어 그대로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 마음먹고 사준 아이들과 이름값도 못하고 어둠속에 쳐 박혀, 기억 밖으로 밀려났어도 원망이나 불평 없이 기다려준 가방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가방 속 종이뭉치를 꺼내며 ‘미안해! 이번에 서울구경 시켜줄게’ 약속하며, 7년 동안 말없이 어둠속에서 무시당하고 있던 새 핸드백이 바깥바람을 쐴 수 있도록 이번 서울나들이에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제대로 눈 한 번 내리지 않은 따뜻한 날씨지만, 서울 날씨는 그래도 추울 것 같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미리 계획한 찾아갈 곳도 있고, 방문할 곳도 많아 활동하기 좋은 간단한 바지차림에 오리털 파카를 입고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새 핸드백을 결정하고 나니 이에 맞는 옷차림을 갖추어 입어야 할 것 같았다. 10여 년 동안 입어보지 않았던 정장들과 오버코트들을, 버리려고 박스에 담아놓았다가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다시 옷걸이에 걸어놓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옷을 하나하나 들춰보았다. 다행히 요즘 돌고 돌아 복고풍이 유행하는 것 같아 용기를 내어 한 번씩 살짝 입고 나가기도 했던 오버코트를 골랐다. 비로드 누비 롱코트가 많은 오버코트 중에서 망설임 끝에 당첨되었다.

 

 겉옷을 가급적 쉽게 골랐으나, 겉옷 속에 입을 옷이 너무도 다양하게 내 손끝을 스쳐지나갔다. 정장도 입어보고, 조끼를 껴입은 세타에 바지도 입어보는 등, 나 혼자 패션쇼를 하며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복고풍 퍼레이드를 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옷이 이렇게 많은데 입을 옷이 없다니!’했을 것이다. 여자들의 심리를 모르는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들이다. 여자들이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은 유행 따라 달라지는 패션에 맞지 않는 옷들이기 때문에, 유행에 뒤쳐진 옷들만 있고 현실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옷이 없다는 뜻이다. 핸드백과 코트에 맞는 새 옷을 사 입지도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뭘 입고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뒤적이며 망설여 보았지만  맘에 드는 옷을 가려내어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벗어놓은 옷들을 아무렇게나 걸어놓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디데이에 손에 잡히고 눈에 띄는 대로 입어야지 했다.

 

  옛날 친정 올케가 시골동네사람들과 서울구경을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구경 온 일행들과 같이 서울구경을 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곧장 와버렸다고 한다. 시골사람들이 농한기를 이용하여 동네에서 단체로 서울구경을 나선 것이다.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에 서울나들이 간다고 시장에서 새 옷들을 사 입고, 모처럼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며 머리에 포마드기름까지 발라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있는 폼 없는 맵시를 다 내고나니 시골동네에서는 최고의 멋쟁이들이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러 시내에 들어와서도 그런대로 봐 줄만 했었는데, 서울역에 내려 보니 행동이나 옷차림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도저히 동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우리 집으로 도망쳐 왔노라 했다.

 

 서울고속버스 터미널에 작은 며느리와 큰손녀가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버스에서 내리려니 친정 올케의 말이 생각났다. 내 모습이 갑작스럽게 촌스러워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 차려입은 내 차림새는 유니색스(unisex)스타일을 선호하는 요즘 사람들 속에, 약간 복고풍이지만 ‘모던(modern)스타일’ 이라 생각했었다. 속에 바쳐 입은 고운 색 세타는 보이지 않으니 괜찮지만,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제일 먼저 선택된 검정색 비로드 누비 롱코트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하의는 검정 니트 롱 주름치마에 양털 앵글부츠까지 신었고, 포인트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커버하기위해 지난해에 손녀가 선물해준 검정 모자까지 머리에 살짝 얹었다. 나름대로 공항패션으로도 손색이 없을 현대적이고 세련된 ‘개화기 신여성’ 스타일을 닮은 것 같았다. 명품 핸드백으로 마지막 패션은 완성되어 호기롭게 출발했는데, 나의 착각같았다.

 

 며느리와 손녀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오시는데 불편하지 않았느냐?”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아이들이 내 모습에 창피할까봐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괜찮다. 멋있다.”고 했다.  요즘 겨울에도 코트를 입는 사람들이 많은데 잘 입고 오셨다고 했다. 너희들이 사다준 새 핸드백의 7년만의 나들이를 위한 컨셉이었다는 말에 한 바탕 웃음으로 어색함도 잠시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차림으로 주일마다 교회를 다녀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내 모습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했을지라도 남들은 내 ‘모던(modern)스타일’ 패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활동이 많은 시내 나들이에는 아들 오리털 파카를 입고 편안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내 ‘모던(modern)스타일’은 20여 일 동안 서울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내 선택을 기다리는 다른 옷들도 남의 눈치 보며 체면 차리지 않고, 단 한 번씩이라도 바깥바람 쐬어주어야겠다. 스타일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2019.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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