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든 아내

2019.02.22 06:28

이종희 조회 수:3

휴대폰을 든 아내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KBS-1TV 아침마당을 시청하며 시무룩하던 아내가 갑자기 일어섰다. 이럴 때마다 가슴이 덜컹한다. 또 무엇이 시비거리가 되었을까, 의문의 시선을 보내려는 순간, 휴대폰으로 거실 한 곳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추억을 담아놓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아내의 행동에 공감하며, 담는 김에 골목부터 차례대로 담으라고 주문했다. 동영상을 편집해 보겠다니 싫지 않은 표정이다.

  1984, 이 집으로 이사할 때만 해도 집이 몇 채 없었다. 과수원이나 공동묘지였던 땅을 새로 개발하여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 터라 을씨년스러웠다. “후유!” 소리를 내며 오래된 한옥으로 올라가던 전에 살던 남노송동 집에 비하면 새로 지은 양옥이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사하던 날, 초등학교 5학년인 큰딸이 꿈만 같다며 정말로 우리 집이냐고 확인까지 했었다. 신바람이 나서 거실에서 옥상으로 오르내리는 딸을 보며 흐뭇해했는데. 그 큰딸이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엄마가 된 나이에 이 집을 떠나려니 아내도 정을 떼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 집은 퇴직장교가 살려고 지은 집이라서 튼튼하게 지으려고 했던 노력이 보이는데도, 우리 취향에 맞게 내부의 문틀 색을 진하게 바꾸고 벽면과 천장에 니스 칠을 더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운치가 있었다. 외벽도 아내와 둘이서 한 해씩 걸러 가며 칠했다.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처마 끝 난간을 칠할 때는 아슬아슬한 곡예도 하면서 페인트공이 되었다. 칠하기에 정신이 팔려 얼굴에 묻은 얼룩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키득거리기도 하고. 행복을 나눈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되살리며 입꼬리를 치켜보았다.  

  35년 전, 대출받기도 어려웠던 은행문턱을 넘어 10년을 갚아가는 동안 자식들 과자 하나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쪼들린 살림살이를 하는 아내와 싸우는 일은 다반사였고. 어디 그뿐인가? 이사하던 해 12월 어느 추운 날이었다. 봉급을 안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금암분수대에서 내려 육지구행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가게 앞에 세워진 호빵통이 보였다. 어린 자식들이 빵을 들고 호호 불며 맛있게 먹을 모습을 그리며 주인에게 호빵을 달라고 했다. 헌데 그날따라 호빵통의 연탄불이 꺼졌다는 게 아닌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눈치 챈 주인은 안방을 지피는 연탄화덕으로 가지고 가서 데워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인정이 많은 아줌마였다.  

  따끈따끈한 호빵봉지를 들고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내의 외마디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방에 들어서니 네 자식들을 부둥켜안은 아내와 늙으신 어머니가 오들오들 떨다가 내가 들어가는 인기척을 듣고 내지른 아내의 외마디 소리였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방금 강도가 나갔는데 보지 못했냐며, 헝클어진 머리에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는 아내로 보아 심상치 않았다. 그들에게 내줄 돈도 물건도 없으니 두 손 싹싹 빌 수밖에 없었던 아내를 생각하니 사지가 벌벌 떨렸다. 어머니와 자식들을 주방에 가둬 놓은 채 말이다. 가족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강도와 씨름하던 아내, 그들에게 협박을 받으며 옆방에 갇혀 있었던 어머니와 어린자식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치며 안쓰럽기 짝이 없다. 오히려 나와 부딪히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이 어머니와 아내의 의견이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추억이다.        

  외아들의 별칭을 물려받은 아들과 함께 남들이 선호하는 서울의 모 대학에 입학원서를 접수하며 눈치싸움을 벌였던 순간, 그리고 합격소식을 듣고 달력을 이어 붙여 플래카드를 만들어 거실에 붙였던 일도 이 집의 추억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플래카드를 제작하던 그때 그 일을 다시 할 수는 없을까?

 

  큰딸부터 스물여덟이 되면 제 짝을 데리고 와서 혼인 허락을 받았던 네 자식들. 성씨가 다른 네 집안에서 내 집 식구가 된 며느리와 사위들이 하나같이 심성이 고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손자를 아홉이나 안겨주면서 말이다. 옥상을 퉁탕거리고 오르내리며 소리를 질러댈 때는 이웃집에 미안했지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은 고마운 사람들이다. 손자들이 오면, 내 몸뚱이의 진을 빼내는 데도 하루만 지나면 그리워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이심전심인지 아내가 이따금 손자를 보고 싶다며 느닷없이 나설 때가 있다. 아내의 손자 사랑이 더 진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보다도 사랑이 깊은 내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것도 이 집이다. 불혹이 한참 지난 늦은 나이에 둔 자식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 해소기침이 나오면 자지러질 듯 하시면서도 당신 몸은 뒷전이었던 어머니. 눈만 뜨면 손자가 등에서 떨어질 새 없었던 어머니에게 불청객 치매가 왔다는 아내의 하소연을 듣고도 인정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야 사실을 알았지만,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했었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 식사하시라며 방문을 여니 새우처럼 오그리고 누워 대답이 없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애잔하게 다가온다.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생을 붙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셨을까? 나는 임종도 못한 죄인이다. 세상을 하직하신 뒤에도 지금까지 자식이 못미더워 불길한 예감이 들 때마다 아내에게 현몽하여 지혜를 주시는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미덥지 못한 자식인지 몇 년 전부터 소식을 주지 않는다. 이제 이사를 하면 어떻게 찾아오실

까?  

  내가 교직생활의 절반 이상을 희로애락이 점철된 이 집에서 살았고, 큰 일 없이 퇴직할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열한 곳의 학교를 근무하는 동안 열정을 잃지 않게 포근하게 안아주었는데 떠나려니 만감이 교차한다. 30년 간 함께 했던 단감나무가 태풍에 쓰러질 때, 14년 동안 골목 밖에서 들리는 내 발소리에 꼬리를 흔들며 트위스트 춤을 추던 흰둥이가 축 늘어져 있을 때는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면 과언일까?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옮기려니 살림살이도 하나둘 정리하는 중이다. 마당이며 옥상, 그리고 창고까지 너른 공간을 이용하다가 실내 공간뿐이니 줄여야 할 수밖에. 이불이며 옷가지와 생활도구까지 이별해야 하니 마음이 아프다. 우리를 위해 당하기만 하고 버려질 정든 가재도구들이지 않은가? 가급적이면 버리지 않으려는 내게 지인들이 성화다. 못이기는 척 일부는 따르지만 못내 아쉬워 가슴에 잔잔히 남아있다. 쓰레기로 이름 짓기에 서운한 것들은 필요한 지인에게 전하고 있다. 언젠가 그리워지면 만나려고.  

  내 반평생을 살아온 집, 웃기도 울기도 많이 했다. 떠나려고 마음먹으니 이렇게 쉬운 것을, 수만 번 생각하고 결정하기까지 서른다섯 해의 정이 놓아주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어디 하루이틀 정이던가? 미운 정보다는 고운 정이 깊기로는 손자들 다음이다. 30여 년 컴퓨터를 배우면서부터 사용했던 책상은 아직도 쓸 만해서 서예 책상으로 쓰고 있는데 아내가 바꾸라고 성화다. 서예야 먹물이 묻으니까 덮개로 씌우면 되는데. 하기야 엄청 무거워서 들기도 어렵다.

  자식들과 내가 읽던 책이 책꽂이에서 대기 중이다. 우리 가족들을 일깨워 주었던 책인데 말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더하는데 앉을자리가 모자라니 도리가 없다. 앨범도 챙기라고 자식들에게 일렀으나 아직도 그대로다. 아파트라는 공간에 이미 살고 있으니 성큼 내키지 않을 테지. 이사할 집에서 내 공간을 줄여서라도 자식들의 추억을 보전해야 할 것 같다. 자식들도 정을 떼어내지 못하는지 전화할 때마다 추억을 더듬는다. 막내딸 내외는 이사하기 전에 다녀가겠다고 약속했다.

 

  이 집에 이사할 때는 아내 혼자 짐을 꾸렸는데, 내가 거들어보니 만만치 않다. 새집에 가면 얼마나 지나야 정이 붙을는지. 손때 묻어 정이 든 흔적을 하나둘 기억하기 위해 휴대폰을 든 아내는 바쁘다. 함께 니스 칠을 한 거실의 벽, 페이트 칠을 한 외벽이 영상으로 돌아올 때마다 얼룩진 얼굴로 돌아오며 또 한 번 웃겨줄까?

                                                           (2019.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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