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환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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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사랑 외 3

2021.11.26 18:32

정종환 조회 수:34

사랑

 

아침이 회색으로 하늘을 색칠한다

울고 있는 나무가지들,

노란 달들,

사각형 세계들을 감싼다

짙은 커피색 커튼 2개,

서로 손잡고 잡아 끄는 바람들,

부러진 가지들,

깨진 달빛들이 쏟아져 쌓이는

비젖은 낙엽더미:

잔디, 울타리, 그리고 상록수

나무 바닥 베란다에 스며드는

하루의 시작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

밤 속 창가와 부러질듯한 가지들 사이에

숨지 않는 만남이다. 막다른 골목.

비뚤어진 고요에서 흘러 나오는

불꽃의 불멸이

작은 직사각형들, 15개로 나눠져 분열된

5대양 6대주를 포옹한다. 포옹으로 심판받지 않은

잠든 사건들을 깨운다

"박카스" 마시며 잠든

기울어진 고요는 편견을 휘저어서

흘려 보낸다.--모든 것 다 잃어도 기억을 잊지 말아라.

이제야 부서진 둥지로 찾아온

어미새들, 서로 눈 부비며 바라본다

파괴자들의 일치된 건배처럼

고요를 적시고, 고요를 기울인다

기울어진 고요 고요 속에서 나눠져 조각난

역사적 시간들, 너무 길어 늘어진 그 사건,

원시림 속 사냥, 사냥개들 울부짖음이

기울어진 고요 속에서부터 흘러 나온다

거리 스피커들

목소리들이 밀어낸다

주름진 사실들이 펼쳐진다

고요는, 겨울 속 고요는 죽지 않는다

기울어질 뿐이다. 숨는 것이지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 뒤, 알리라.

그들은 고요를 가장 무서워 한다는 것을

고요는 함성이다

기울어진 고요:

과녁으로 질주하는 화살,

고요가 기울어지는 시간.

 

........................................................................................................................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다가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이 신호등 초록색 신호로 바뀌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길기로 유명하다

앞에 차 2대가 있었다

하늘과 주위를 둘러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횡단보돌 걷던 한 분이

잠시 휘청거리더니 그만 길 위에 쓰러졌다

다행히 머리에 모자를 쓰고 계셨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와 빵이

흩어졌다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일어나지 못하셨다

순간, 마음은 문을 열고 나가려 했는데,

앞차 운전자들이 그대로 있어서

나 또한 그대로 있고 말았다

몇 초 후,

나이 든 누군가 다가와 일으켜 세워 데리고 갔다

그 옛날 같았으면,

앞차 운전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달려가 부추켜 횡단보도를 건너게 해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 또한 앞차 운전자들처럼

나이가 들면서 타인의 불행에 강해진 것이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들 하지만

본능적인 삶, 동물적인 삶에 안주해 가는 것이다

어찌 창조된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신호등 불빛이 바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마음에 남은 그 자리는

벗어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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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 기계

 

계속하여

옷을 가라지 세일에서 산다

타인의 방긋 웃음,

1 달라 짜리 가격 흥정,

이웃 가족들을 볼 수 있어서

도서관 책들 다음으로 나는 좋아한다

가을이 오면,

발길이 머무는 곳,

가라지 세일에서

좀 더 큰 겨울 옷을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스몰, 친구는 라지

여기는 미국이니까

그래도 나는 즐겁게 쿼러들을 사용해서

이웃의 사계절을 사가지고 집으로 온다

모처럼 손에 넣은 캐시미어 옷이라

조심 조심 손으로 빨아서

건조기에 넣어 말린다

30분 뒤,

고급스러운 사이즈 L은

평범한 옷 S로 나온다

세탁소 주인은 내가 건조만 한다고 눈치하지만

이해하고 이해해준다. 이웃이니까.

입지못할 옷을 입게 해주는

나의 연인, 우리 건조기.

 

..................................................................................................................

 

청진기

 

드높은 하늘만큼

깊고 깊은 눈길,

티끌처럼,

앞을 보고 있다

그 곳에는 굶주림이 있고,

그 곳에는 폭력이 있고,

그 곳에는 비탄의 눈물이 있고,

자연의 고통이 있다

조각난 벽들,

우주가 쏟아지는 거실이 있다

 

같은 의자에 앉은

또 한 사람의 눈빛도

같은 곳을 보면서,

두 사람 같은 땅을

보이지 않게 밟고 있다

 

한 어린 생명의 호흡이

순간 순간 지속되어

웃음을 잃지 않도록,

그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

굶주림과 폭력과 비탄이 없는 소리

들으려 왼쪽 가슴에 댄다

 

청진기 있는 곳에

당신도 있으리라.

 

                                 -폴 파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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