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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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맨발의 황혼

2017.12.27 20:56

라만섭 조회 수:10

맨발의 황혼

라만섭

 

남들처럼 골프를 향한 열정이 그리 뜨겁지 않던 나에게 걷기 운동은 일찌감치 나의 주된 야외활동의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아마도 걷기 운동은 외적 요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실천할 수 있는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오후의 맑은 햇살 아래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가슴속 깊이 들이마시며, 파도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가 빚어내는 대자연의 교향악을 귓전에 하고 해안을 따라 걷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다. 또 아담하고 아름다운 동네 공원을 찾아 호수 위로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와 두루미의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면서, 융단처럼 깔린 잔디위로 걷는 것은 어떤가. 온갖 이름 모를 야생화와 수목이 우거진 산책길에서 산림욕을 즐기며 걷는 가운데, 어느덧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 또한, 어찌 나쁘다 할 손가!

 

걷기로 말하자면, 나는 이전에 살던 사으스.베이의 바닷가 동네 사으스.쇼어파세오..라는 이름의 길을 잊을 수 없다. ‘웨스턴 애베뉴의 최남단이 태평양과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1마일쯤 동쪽으로 뻗은 길이다. 미국독립 2백주년에 즈음하여 한국정부가 미국에 기증한 우정의 종각이 위치한 언덕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다. 남태평양을 눈 아래 두고 유서 깊은 공원을 좌우로 끼고 있는 길 양쪽에는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야자수 나무들이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겨 주는 운치 있는 곳이다. 내가 그곳을 찾게 된 연유는 2009년 왼쪽 내이(內耳)의 청력 상실과 뒤이은 고관절 수술 직후, 의사의 지시에 따라, 걷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부터 이었다.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재충전 하고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확인 하던 무렵 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이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했다. 파세오..마를 우리말로 옮기면 바닷가 산책로정도가 될 것이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그곳에 가서 걷는 동안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는 마음의 평화는 그 무렵 나의 빼놓을 수 없는 생활가 되었다. 그 당시의 팍팍하던 내 마음을 너그럽게 토닥여주던 그곳의 수려한 경관에 대해서, 느낌표를 찍고 싶은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맑은 날이면 바다는 푸르다 못해 까만 색깔을 띤다. 햇볕에 반짝이는 은파를 타고 멀리 일직선으로 뻗은 수평선을 바라볼 때면 가슴이 저절로 뚫리곤 했다. ‘카타리나섬이 바로 눈앞에 병풍처럼 드리워 있었다. 해안을 따라 형성된 높이 백여 미터쯤 되는 절벽에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세월을 말해주듯, 그동안 변해 내려온 바닷물의 수위가 풍화작용으로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그 자체로 수십억 년 된 지구의 역사를 웅변해 주는 자연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수평선 아래로 서서히 사라지는 석양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먼 길을 찾아오신 부모님을 배웅해 드리던 마음처럼, 애틋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눈 아래 해변 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위 위에 누운 채 몰아치는 파도를 즐기는 물개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만화방초의 봄철이 돌아오면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만물이 소생하는 생동감으로 넘쳐 났다. 하늘에는 기러기 떼들이 무리 지어 나르고, 잔디 위에는 갈매기와 비둘기들이 먹이 찾아 모여 들고 다람쥐 가족이 분주히 오가며 잔치를 벌이기에 바빴다. 그들과 어울려 보내는 이 시간에는 라는 존재가 자연의 일부임을 어느 때보다도 실감 하곤 했다. 무위자연으로 마음을 비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요즈음에 와서는 스타일이 바뀌어,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뿌리 칠 수 없는 새로운 재미가 붙었다. 건강에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고 어떻게 살아 왔을까 싶다. 날씨 좋은 날 해질 녘에 수평선 아래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가슴에 안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맛은 참으로 독특하다. 파도 칠 때 마다 휩쓸고 내려간 썰물이 남기고 간 조가비들은, 마침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새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이내 그 자리는 물새와 갈매기들의 집합 장소가 된다. 그 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노을을 배경 삼아 죠깅을 하는 젊은이의 발자취를 따라 해변을 거닐다 보면 내가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는 듯 한 판타지에 젖어들 때도 있다. 어떤 서핑 족 들은 해가 넘어간 뒤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파도타기를 즐긴다. 귓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를 반주 삼아, 막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낙조를 볼 때면 온갖 시름이 눈 녹듯 사라진다. 한나절 이글거리던 태양이 피곤한 모습으로 자취를 감추는 황홀한 장면은, 내가 몸담고 있는 지구라고 하는 유성이 자전하고 있는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눈썹달은 시려서 눈이 맵다.

 

내가 자주 나가는 .비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다. 비 오는 날은 그런대로 별미가 있다. 운동화를 벗어든 채 우산을 받쳐 들고 해안가를 걷는 맛은 신선함을 더해 준다. 어떤 비 오는 날 오후 해안을 따라 걸으며 말을 걸어온 풀러톤에서 왔다는 내 나이 또래의 맨발의 백인 노인과의 해후는, 마치 먼 데서 찾아온 옛 벗을 만난 듯 반가웠다. ‘디저트삼아 피어를 거니는 것으로 오늘의 걷기 일과를 마무리 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맨발의 황혼 길에 서 있는 나에게 언제나 행복을 안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