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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착각 속에서

2018.01.05 06:43

라마섭 조회 수:72

착각 속에서

보기(듣기)에 그럴듯해 가짜를 진짜로 착각할 때가 있다.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넘기는 수도 있겠지만, 가짜가 진짜로 위장함으로써 착각을 일으키게 할 때에 문제가 생긴다. 가짜뉴스가 오늘의 정보화시대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파급력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가짜와 진짜의 착각문제는 현실 사회의 거의 모든 면에 걸쳐 나타나는 것을 본다.

 

진리를 찾았다는 내면의 믿음(착각)은 인간을 잔혹하게 만들기도 한다. 공산주의 이상향을 건설한다는 기치아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Khmer Rouge)는 한 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국민 170만 명을 도살 하는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 1975년부터 4년 동안에 걸쳐 캄보디아 인구의 1/4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의 믿음만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맹신했던 까닭이다. 그들의 앞에는 오직 맹목적인 이념추구만 있을 뿐, 사랑이나 관용 같은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참된 양심이며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 같은 절대적(주관적)인 믿음은 자연히 이웃을 외면하게 되고 독선과 배타를 잉태하며 결국 파멸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믿음의 모순이다. 믿음이 극단으로 치우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들의 지도자 폴폿(Pol Pot)은 원래 조용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동물애호가에다 고전음악과 그림을 좋아 하며 눈물 많은 여린 성격의 감성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사이비진리의 맹신자가 되어 일찍이 유례없는 잔혹성을 역사의 페이지에 새겨 놓은 것이다. 잘못된 착각이 그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살인자의 인생을 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오래전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죤.브라운 이라는 이름의 목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참 신앙은 수직적인 믿음이 수평적으로 되는데 있다고 설파한 그는 한국인들이 이에 취약한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한국어에도 능통한 한국통 이다. 믿음이 이웃사랑의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있는 믿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입으로만 되 내이는 하나님사랑은, 이웃사랑 이라는 행동의 뒷받침이 따르지 않는 한, 허구(위선)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 신을 구두선(口頭禪)처럼 외치는 사이비 종교의 수직적신앙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中略). 위선을 진선으로 착각하는 일은 모두의 불행 이다.

 

어떤 현상을 놓고 그 보편타당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선행되는 조건에 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거듭된 검증을 거쳐야만 한다. 전제를 이루는 조건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 없이는, 보편성의 정립이 있을 수 없다 하겠다. 만일 전제(Premise)나 가정(Hypothesis)에 변화가 있으면 적용해야할 기준과 룰(Rule)도 따라서 바뀐다. 새로운 상황아래서는 개인의 선택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설이 현실에 심어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명제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을 삼가 하고자 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 그 같은 가설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착각(착시현상)의 굴레에 갇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내가 속한 공동체)는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잘난 맛에 산 다고 하지 않든가! 어떤 이는 세상에 그런 맛도 없이 살아갈 재미가 어디 있겠나 하며 다소 해학적인 말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실제로 자아도취(Narcissism)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꽤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미국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 차별의식과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사회정의 실현에 역행 하는 착각 증상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1세기의 지능사회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한다. 경쟁에서 일등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평생 패배자로 남아야 한다는 말인가.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업(Cooperation)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제언이 무게 있게 다가온다. 나는 남보다 잘났다는 생각은 부질없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착각의 꿈에서 깨어나 다 같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힘을 합쳐 나가야 하는 것이 싫든 좋든 P.C.(Politically Correct)시대에 사는 우리의 운명 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행태에서 필연적으로 일어 날수 밖에 없는 한계가 이른바 초점주의(?)(Focalism)라고 한다.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상황을 판단함에 있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취향에 맞는 한두 가지 요인만을 선호한 바탕위에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태적으로 이미 주관적 착각의 구조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객관적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은, 불행 하게도 한낱 설()의 범주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주관적인 착각이라는 비좁은 방에 갇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겠다. 여기서 이분법적 논리로 선악을 가르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선의(善意)의 건전한 착각은 자주 할수록 행복해 진다는 역설이 가능해 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지도 않을는지.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어느 정도 착각의 베일에 가려져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착각이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객관(진짜?)이면 어떠하고 주관(가짜?)인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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