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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어느 백수의 독백

2018.02.04 10:17

라만섭 조회 수:12

어느 백수의 독백

라만섭

더러는 지난날의 싱그럽던 젊은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때 일뿐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수많은 욕망으로 점철된 유혹 속에서 보낸 긴장의 지난날 들이, 이제 와서 조금은 치기로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르익은 성숙의 가운과 느긋한 여유 로움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좋다.


나의 백수 생활은 2,000년도에 은퇴와 함께 시작 됐다. 이제 와서 생각할 때 좀 일찍 시작 한 것 같다. 초기의 백수 생활 수습 기간(?)에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른 심리적인 조정이 필요 했고, 그 후로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얼마 안 가서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 했던 것이다. 왼쪽 귀의 청력 상실, 고관절 수술, 전립선 수술 등의 고된 수련 과정을 거친 다음 에서야, 서서히 몸과 마음의 균형 감각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비치리저 .월드로 이사온 이후로 본격적으로 백수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그럭저럭 백수 생활 15년이라는 이력이 쌓였다.

백수의 진수는 아무래도 원숙함과 여유로움에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지금의 모습에서 옛날 젊었을 때의 패기와 자신감을 찾아 볼 수는 없을지 모르나,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여유와 자유를 그 무엇과도 바꿀 생각은 없다. 우선 경제적 부담이 없어서 좋다. 부양할 가족이 없어 홀 가분 하다. 손자 녀석들 자라는 모습을 지켜 보는 즐거움 속에, 아내와 둘이서 빚 없이 살다 보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매달 어김없이 입급되는 연금 수입과 얼마간의 금융 자산은 시름 없는 노후를 보장해 주니 말이다. 요즈음 들어 주머니 사정이 좀 나아진 듯 하다고 아내가 말 하든데, 금년 연말에는 구세군 자선 냄비에 얼마를 써 넣을까 생각해 본다.

건강에는 장사가 따로 없다고 한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젊어서 못해 본일,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서 해보고 싶다. 봉사 활동에도 힘을 보태고 싶다. 백수의 일과는 바쁘다. 할 일은 많고 갈 데도 많다. 어떤 백수의 사망 원인을 조사 해보았더니 과로 사였다고 한다. 자기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간직 하고 싶다. 시간에 얽매인 긴장된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를 즐겨 보자. 여행도 가고 운동도 하며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에 몸담아 가면서, 정신적으로 활발한 생활을 이어 가자. 글쓰기와 노래 부르기 그리고 모래사장 걷기는, 나의 백수 생활을 살찌게 해주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는데, 이 모두가 백수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백수는 부러운 것이 없다. 욕심 다 내려놓고 무욕으로 돌아가니 홀가분해서 좋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긴장된 일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취미를 살려 나갈 여유가 있어 좋다. 자연은 나를 부른다. 높푸른 하늘 아래 내려 쬐는 맑은 햇살을 즐겨 보자. 들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나 나무들과 교감을 가져 보자. 산과 바다로 나아가 자연의 품 안에서, 자연의 고마움에 눈을 돌리자. 멀리 펼쳐 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원 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폣속 깊이 마셔 보자. 산골짜기의 오솔길을 걸으며 얼굴을 스치는 산들바람의 간지러운 감촉에 취해 보자.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연과의 대화에 젖어 보자. 자연 속에 안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미 하게 된다.

행복은 내일 먼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순간 이 자리에서, 더불어 베푸는 평범한 순환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저 같이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는 좋은 만남에 행복이 있다. 만족의 요체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필요한 것만 가진다는 것이다. 많이 가지고도 행복 하지 못한다면, 적게 가지고도 만족함만 못하다고 하겠다. 하나를 버리면 그 자리에 다른 것으로 채워 지는 것이 순환의 이치이다.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림으로써 마음의 정화를 이루고, 필요한 것과 함께 하 고픈 소박한 희망이 나를 행복 하게 해 준다.

. 불행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고 한다.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실감 하게 되는 것이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이며 또 나 혼자만의 느낌일 까부냐! 그때마다 버릇처럼 되 뇌이게 되는 것은 나는 무엇 때문에 태어 났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대답 없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인생길 굽이 굽이 용케도 헤쳐 온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가끔 자신을 바보라고 부른다. 바보는 그저 현실에 만족 하고 오늘에 행복을 느낀다. 바보의 눈에는 내일의 장미 빛 약속이 불확실 하게 비친다. 그보다는 지금 열성을 다하며 사는 투명한 오늘이 낫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시인은 노년을 상실의 삶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살아 오면서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생의 저편을 향해 황혼의 언덕을 넘어가는 여정의 실루엩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철모르던 시절의 치기를 벗어난 후에 얻어 지는 성숙의 향기이다. 무엇을 터득한 다음에 오는 잔잔한 평화의 울림이다. 그 여정은 노후의 꿈나무를 가꾸어 가는 백수의 보람 이오 즐거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