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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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봄날이 간다고 아쉬워 말자

2018.07.14 08:09

라만섭 조회 수:12

봄날이 간다고 아쉬워 말자

 

잔뜩 무르익은 봄날이면 서로 다투듯 화들짝 만개하여 잔치를 벌이던 목련화와 진달래 그리고 들국화가 어느 날 갑자기 매정하게 떠나버리는 야속함에, 덧없는 속 앓이를 거듭하기를 몇 해 이던가. 복사꽃 피고 들장미가 꽃 멀미를 일으키는 정겨운 풍경은, 어느덧 지는 봄날과 함께 사라지고 말더라.

 

아름다움도 극치에 이르면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는 슬픔처럼, 세월과 더불어 그렇게 가고 마는 것인가 보다. 어차피 차오르면 질 꽃인 줄을 알면서도 지레 부려보는 몽니인가. 종달새는 하늘에서 지저귀고 꽃은 들에서 피고 지는 자연의 모습에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세월의 무상함을 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다시 봄 여름.....이 오고 가는 모습에서 그것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자연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항상 돌고 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만물은 변한다는 진리일 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인 것이다.

 

무상은 허무와는 다르다. 일시적인 상실감에서 오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무상은 내일의 희망을 약속하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해가는 과정의 하나로서 거기에는 생명력이 잠재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부정적인 의미의 허무감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시적인 슬픔을 경험하게 될지는 몰라도, 무상은 진화를 가져오는 아름다운 슬픔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진화과정을 거치며 더욱 성숙해지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일을 매조지 하게 되는 것이리라.

 

인간의 사유는 풍요로워야한다. 그 앞에 그 어떤 제약도 가로 놓여서는 안 될 일이다. 주관적으로 아무리 강력한 증거라 하더라도, 그자체로 객관적인 확증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반론과 비판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합리적인 의심( Reasonable Doubt)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돼야 한다. 사유는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랑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보자. 적어도 우주의 기원이라든가 생명(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한번쯤은 생각해 보자. 그저 주어진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만 한다면 바깥세상을 모르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고력을 스스로 울타리 안에 가두는 일이다.

 

산을 파악하는데 있어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산을 구성하는 개체인 나무의 생태를 분석함으로써 산 전체의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방법을 미시적이라 한다면, 산을 하늘 위에서 관찰함으로써 산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거시적 방법인 것이다. 이는 원래 국민 경제를 분석 하는데 있어 거시경제와 미시경제 라는 두개의 상이한 경제학적 접근방법이, 여타의 다른 분야에도 널리 원용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거시든 미시든 간에 궁극의 원리(결론)는 하나로 통한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물질이라도 그 자체 내에 우주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불교의 교리는 말한다. 또 순간적인 찰나에도 그 속에는 영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공의 차이를 극복하는 개념이다. 만물은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고 한다.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현상은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하는 연기법(緣起法)이 그것이다. 만사는 거대한 그물처럼 서로 연관 돼 있다는 것이다.

 

만나면 헤어지게 마련인 것이 자연의 순환 법칙이다. 다음 단계로의 진화와 창조를 위한 이별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 진다고 서러워하고, 봄날이 간다고 아쉬워하지 말 것이다. 머지않아 꽃은 다시 피고, 봄날은 또 다시 찾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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