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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시사 평론-진보는 왜 어려운가

2020.02.08 17:22

라만섭 조회 수:1

시사평론

 

진보는 왜 어려운 가

 

가난과의 힘겨운 싸움으로 점철된 34년에 걸친 긴 이국 생활을 마감하고 65년의 고달픈 삶을 마감한, 칼 마르크스(1818~1883)는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제1차 산업혁명을 전후한 영국 자본주의의 생성과정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생산 수단을 독점한 부르조아 계급인 자본가 지주들의 횡포와, 무산 계급인 노동자 농민이 수탈당하는 모습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면서 자본론’ 3권을 집필했던 것이다. 1848년에는 친구인 엥겔스와 합작으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 (Communist Manifesto)’도 발표한다.

그의 유물론적 역사관과 노동 잉여(剩餘)가치설이, 인류 문화사 연구에 끼친 학문적 공헌을 부정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혁명을 통한 푸로레타리아의 독재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그의 과격한 사고는, 비인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명되어 이미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바 있다. 전 세계가 목격한 1991년 구 쏘련의 붕괴는, 그의 판단 착오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무장한 볼세비키 혁명을 이끌며 1917년에 거창하게 등장한 쏘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은 74년을 버티다가 힘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장의 희생물이 된 바 있거니와 그 실험은 아직도 지구상에서 수정된 형태로 끈질기게 진행되고 있다.

쏘련의 몰락 이후 유럽의 진보에는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신좌파(New Left)로 태동한 학생운동은 유럽의 진보에 근본적인 혁신을 불러온 계기가 된 것이다. 유럽진보의 특징은, 철저한 자기 성찰을 바탕 삼은 공정한 비판 정신과 지속적인 혁신을 추구해 나가는 열정에서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은, 진정한 노동의 해방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중국식 수정 사회주의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더군다나 북한과 같은 세습 독재 체재는 사회주의 국가로 간주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북한 전역은 주체사상 체재가 관리하는 커다란 감옥이나 다름없다. 개인 숭배의 사이비 종교집단이 운영하는 신정(Theocracy)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유와 생명의 존엄성이 완전히 유린당하는 악의 사회이다. 남한의 이른바 진보 집단은, 평소 정의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도 유독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하여서 만은 굳게 입을 다문다. 인권은 보수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다 같이 추구해야할 보편적 가치임을 전제할 때, 이는 정의를 가장한 비겁한 위선일 수밖에 없는 행태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의 진면목이다. 실패한 사회주의 모델의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솔직한 자아비판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혁신을 모색하는 참신한 접근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가 가야할 정도라고 믿는다.

 

부의 양극화 현상 등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나 또는 후진적 우파 독재가 보여주는 여러 부정적 측면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교조적 마르크스 사상으로 눈을 돌리는 젊은이들의 이념적 방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특히 남한과 같은 지정학적 특징을 지닌 곳에 있어서랴. 하바드대의 저명한 세계적 경제학자였던 요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교수는 일찍이 1943년에 그의 걸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를 발표하여 커다란 반응을 일으킨바 있다. 즉 현존하는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끊임없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과정을 거쳐 혁명을 통하지 않고 종국에 가서는 사회주의 사회로의 건설적 발전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같은 변혁이 자유 민주주의 체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종착역은,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 인 것이다.

사회주의를 실천하는데 있어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구쏘련이나 현 중국 공산당 독재와 같은 전체주의 체재 이고 다음은 스캔디나비아의 여러 나라들의 조용하고 성공적인 케이스에서 보는 바와 같은 민주적 사회주의 체재이다. 우리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와 같은 북 유럽 국가에 주목하는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구 쏘련의 전체주의 통제 경제가 끝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에 휩싸인 중국 공산당은, 개인의 자본주의식 경제 활동을 허용하고 시장 경제를 접목한 수정판 사회주의를 실험 중에 있는 것을 우리는 안다.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어떤 특정 부류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평등하고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산당 독재하의 부패한 중앙 통제 경제가, 욕망의 주체인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가 없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한낱 헛된 망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지적해 준다. 진보에는 끊임없는 혁신이 있어야한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과정의 공정함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자유이념에 충실한 자본주의가 평등을 이루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타협을 하듯이, 본래 평등사상을 신봉하는 사회주의도 자유의 창달을 위한 정책적 타협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로써 정의사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첩경이 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 본다. 협치의 정신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미국 민주당의 2020년 대선 후보 가운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소개하며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 의원도 이에 가세하는 분위기이다. 이들은 진보적인 공약을 내세우며 젊은 지지층에게 어필하고 있다. 자본주의 본산인 이곳 미국에서 이 같은 상황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인들의 의식 변화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면서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 정의가 애매한 경우도 있지만, 둘은 새의 날개처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개혁 없는 보수에 장래가 안 보이듯이, 전진 없는 진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보다 큰 정부의 역할을 표방하는 진보에는, 자연히 그에 따르는 실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참된 진보에게는, 부패를 모르는 청정함과 국민과의 소통능력 또한 필수적이다. 독선과 배타로는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전진하는 진

보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