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사랑

2011.02.22 13:52

백남규 조회 수:408 추천:86

원의 사랑



  5년전 나는 마흔살이었다. 이혼한 지 2년이 조금 더 지났다. 늘 새벽까지 깨어 있었고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정신은 말짱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남미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스패니쉬 유행가 소리로 하루  종일 시끄러웠고 지저분했다. 2층은 주로 독신자들이 살았다. 길다란  복도끝의 문을 열면 바로 세븐 일레븐 주차장이 나왔다. 나는 늘 거기서 말보로담배와 버드와이저를 샀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이어서 언제든지 밤 늦게라도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냉장고 안에는 시어터진 김치와 한국마켓에서 사온 밑반찬이 곰팡이가 슨 채  썩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는 부엌뿐이 아니라 침대와 소파 심지어 라디오 속에서도 기어나왔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유백색 알이 소복히 쌓여있었다. 식탁에는 며칠 전에 산 바나나가 검은 반점을 무수히 내뱉으며 누워 있었다. 오늘은 청소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밤이 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민와서 처음 배운 것이 세탁일이라 나는 세탁소에 다녔었다. 내가 하는 일은 기계적인 일이다. 주머니를 검사하여 볼펜이나 이물질을 꺼내고 얼룩이나 때를 뺀 다음 드라이 클리닝 기계속에 옷을 집어 넣고 ‘삐’소리가 나면 꺼내어 행거에 건다. 기계속에서 옷이 빨아지는 동안 또 한 무더기의 옷을 준비한다. 지시된 일을 지시된 속도로 아무 감흥없이 일을 한다는 건 참 고역이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 주인이 바뀌자 손님들은 공연히 트집을 잡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한 손님은 형광등 불빛에 얼룩을 찿기 힘들자 바깥으로 옷을 들고 나가서 햇빛에 비쳐 보았다.실크 옷은 색깔이 변했고 소매길이가 짧아지기도 했다. 흰 색이 분홍빛이 되었다는 손님의 불평에 새 옷값을 물어주느라 아내와 나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내와 헤어진 후
세탁소를 팔고 집근처의 노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 취직을 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하여 보일러를 켜고 물이 끓는 동안 청소하고 옆 도우넛가게에서 커피와 머핀을 사와서 먹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으면 적막한 방안공기가 나를 외로움에 떨게 했다. 식탁은 아침에 집을 나갈 때의 어지러운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뻣뻣하게 말라 비틀어진 생선토막, 물기가 날라가서 겉잎이 쪼그라진 김치, 여기 저기 튀어 지저분하게 말라붙어 있는 밥풀이 폐허처럼 적막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담배를 피우며 벽에 기대앉아 냉장고에서 꺼내온 소주를 들이킨다. 답답했다. 미칠 것 같았다. 깊은 밤 인적 없는 15번 도로를 밤새도록 쉬지 않고 라스베가스로 달려가 하얗게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했었다. 텅 빈 사막에 검불만 찬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여자가 그리웠다. 살이 그리웠다. 아내와 헤어지자 욕망은 더욱 세차게 끓어올랐다. 머릿속은 온통 여자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꽉 차 있었다. 자정이 지나 누드바에 간 적이 있었다. 어둡고 시끄러운 실내엔 홀랑 벗은 백인 여자들이 훼션모델처럼 왔다, 갔다 하거나 기다란 기둥을 잡고 돌거나 다리를 꼬거나 앉았다.일어 섰다 했다. 맥주를 마시며 여자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욕망은 오히려 사그라졌다. 옷 벗은 바비인형 같은 여자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에 그만둔 수음을 다시 시작했다. 돈을 주고 여자를 살까 했지만 사랑없는 섹스는 한순간의 배고픔은 면하겠지만 일을 치른 후에 더욱 허탈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프리웨이 옆 언덕이 연두빛 풀잎으로 곱게  채색된 걸 보니 봄이 왔나보다. ‘아. 봄이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오랫동안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덥수룩한 머리칼이 갑자기 견딜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벌몬길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미장원에 급히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토요일인데도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미용사인듯한 젊은 여자가
“가운으로 갈아입으세요”
하며 구석으로 안내하며 가운으로 갈아 입혀주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마치 여행을 하다가 예기치 않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을때처럼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주위가 문득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짧은 머리에 눈빛이 서늘했다. 얼굴 전체의 이미지가 청순하면서도 서구적인 인상을 풍겼다. 콧날이 오똑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자리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수염을 며칠 째 깎지 않아 덥수룩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낯설었다. 거울 앞엔 연습용 인형이 놓여있었다. 여자는 아마 미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 머리로 마음 놓고 연습하세요.”
라고 말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릴때까지 가슴이 뛰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 여자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나에게 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로 시작되는 긴 글을 써서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었다. 또 한 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그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는 결혼한 몸입니다.”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봄을 느끼게 해 주는 여자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번엔 더 긴 글을 썼다.‘들어 오지 마시오’란 팻말 너머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진동하고웃음소리가 크게 들리는군요. 울타리를 넘다가 죽는다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한국에 살았을 때 여름에 개를 잡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 사냥꾼이 맹수를 추격하는 장면도 보았다. 역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궁지에 몰린 짐승의 표정은 공포보다 증오에 가까웠다. 역전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나는 세상을 향하여 증오의 표정을 보여야했을까? 모르겠다. 과거는 무형의 기억일 뿐이다. 추억이란 무엇인가? 한 순간의 강렬했던 빛깔, 냄새, 소리, 모습일 뿐이다. 아무리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하더라도 혹은 즐겁고 환희에 겨웠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오히려 심정이 담담했다고 기억되지만,아니면 갈구가 끝난 상태였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한 달이 지난 후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오후에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거대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가 떨리고 있다. 뿌리까지 떨리고 있다.잎사귀 하나하나마다모두 신들린듯이 떨리고 있다. 나는 거대한 바람에 몸을 맡긴 한 그루 나무였다. 약속한 장소인 윌셔의 한 카페에 흥분한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강원도 춘천이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혼자 올라와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호텔에서 일할 때,한 친구가  소개한 남자와결혼을 했었고 남자가재미교포여서 10년 전 LA로 건너왔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느정도 자라자 미용학원에 등록을 했고 지난 겨울에 자격증을 땄노라고 했다.
“열심히 사시는군요”
나는 그녀을 칭찬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나는 국문학도였다. 하루는 선배가 나에게 지도교수님께 찿아가 보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하니, 전공과목이 과락이 될 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찿아가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박사과정 시험에 3번째 실패했다. 그 몇 달 전인가 수업을 마친 우리들은 신촌 시장골목에서 술을 마셨다. 석사과정 종합시험을 본 다음이라 어쨌든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했다. 일차를 마치고 어느 정도 취기가 돈 우리들은 학교 뒤쪽에 자취를 하고 있는 친구집으로 몰려갔었다. 소주,오징어,김치,새우깡,과자 부스러기를 사들고 단칸방에 자리잡고 다시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몇 순배 돌자 거나해진 K 선배가  갑자기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한 번하고 두 번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아름다운 그 여인과 자꾸만 하고 싶네~

한 번 빨고 두 번 빨고 자꾸만 빨고 싶네~
아름다운 젖꼭지를 자꾸만 빨고 싶네~

누군가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으며 좌중은 환호와 함께 후배 녀석 두엇이 일어나 외설스럽게 엉덩이를 흔들어 흥을 돋구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K선배는 노래를 마치자 취기가 도는 목소리로 “ 야, 오늘 우리 전부 옷 벗고 마시자.” 며 옷을 하나씩 훌러덩 벗어던졌다. 모두 어이가 없어 뜨악한 표정을 짓자 선배는 목청을 돋구었다.
“이 놈들아, 안 벗어”
“오늘 안 벗는 놈은 전부 역적이야.” 어쩌고 하면서 삿대질을 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끝까지 벗지 않은 것은 나 혼자였다. 선배가 심한 말까지 했지만 벗지 않았다. 벗기 싫었다. 강압적으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는 선배와 주먹다짐까지 할 뻔 했지만 친구가 말려서 간신히 수습되었다. 그날은 늦어서 모두 자취방에서 날을 새웠다. 새벽에 해장국집으로 어슬렁 내려가는데 선배가 나를 불러세웠다. “야.임마 너 그따위로 살다간 한국서 못산다.” 한 마디 툭 던지고 가 버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졸업하고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선배의 그 말이 자주 떠올라졌다.
아마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진 것도 그 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남들은 잘도 승진하고, 학위도 제 때에 받고 시간강사로 혹은 전임으로 한두명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눈치 빠르게 재테크를 하여 평수가 넓은 아파트로 잘들 옮겨 앉는데 당신은 도데체 잘 하는게 뭐냐고 닦달이 심해졌다. 생각해보니 잘 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셨다. 황혼이 깔리면 공연히 가슴이 헛헛해져서 한 잔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말 만들기 좋아하는 친구는 나에게 황혼병에 걸렸다고 아주 황혼병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황혼이 되면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병-황혼이 깜깜한 밤이 되면 내 영혼은 캄캄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의 나의 삶은 엉망이었다. 나는 몹시 지쳐있었고 매일 매일이 초조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삶은 싸움이 아닐진대 어쩐지 자꾸만 싸움 같아 보였다. 링 위의 얻어터진 권투선수처럼 내 속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쉬고 싶었다. 권투선수에게도 일라운드 뒤의 휴식이 필요하듯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마침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간 누나가 가족이민 신청을 해두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민국에 알아보니 마침 이민신청이 가능했다. 서둘러 보따리를 싸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때 한국에선 한 재벌총수의 말이 유행했었다. 마누라 빼고는 모두 바꿔보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마누라는 이곳으로 왔어도 생각이 바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종일 좁아터진 세탁소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다보니 신경이 더욱 날카로와지고 싸우는 날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날 거짓말처럼 덩그러니 낡아빠진 방에 혼자 팽개쳐져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짐을 싸서 아이들과 나가버렸다.
“사는게 재미 있나요?”
“그저 그래요.”
“쓸쓸해 보여요.”

l그녀가 훨씬 정답게 느껴져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이 분명 하였다. 눈가에 어리는 그늘이 우수에 젖어있었다.

흔히 봄이 되면 여자가 사랑병을 앓게 된다는데 남자의 계절인 가을이 아직 멀었는데도 나는 미치도록 외로움을 느꼈다. 거리나 식당에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보면 공연이 가슴이 쓰렸다. 혼자 살기 이전부터 냉냉한 집안 분위기였지만 혼자가 된 후 더욱 사람의 정이 그리웠다.
여자의 표정이 더 쓸쓸해 보여 뭔지 모를 아픔같은 것이 명치끝을 눌렀다. 여자는 헐렁한 모버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으나 뭔가 수심에 잠긴 표정이 언뜻 내비쳤다. 청초하게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카페 탁자의 유리 밑에 그림과 함께 적힌 글이 있었다.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 망정/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더디 새오시라

근심쌓인 외로움 베갯머리에 /어찌 잠이 오리오/ 서창을 여니/도화가 피어나도다./도화는 시름없이 봄바람에 웃는구나.

조선시대 사대부에 의해 음사로 규정되어 거의 멸절되고 겨우 살아남은 고려속요 중의 하나인 ‘만전춘’을 엘 에이의 카페에서 만나다니,너무 반가웠다. 사실 남녀간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한 고려시대 선인들이 훨씬 더 인간적이지 않았을까. 위선적인 조선조양반에 비하면 말이다. 성에 대하여 솔직하지 못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섹스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 사회는 섹스를 반대하고 있다. 섹스를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섹스를 좋아하면서 섹스를 통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이 세상은 갈수록 흥청거리고 섹스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그녀와 오늘밤 댓잎자리에서 죽어도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섹스는 깊은 충족감을 줄 수 있다.그것이 진실하다면 인간에게 언제나 애틋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슨 생각하세요?”
여자는 활짝 웃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안고 싶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측은하다는 눈빛이었다. 문득 눈빛속에 푸른 섬광이 번뜩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숨기고 있던 욕망이 살짝 내비친 것으로 느껴졌다.

여자는 화제를 어린 시절로 돌렸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방에 누워 있던 아버지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했다. 버스회사 사장이었던 여자의 아버지는 어느날 정비공이 일을 제대로 했나,안 했나 점검하기 위해 버스밑으로 상체를 넣는 순간 뭐가 잘못되었는지 버스가 주저앉고 말았다. 반신불수가 되어 오랫동안 누워계시다가 여자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곧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슴이 아팠다.

카페를 나오니 오후의 잔광이 서쪽하늘에 붉게 걸려 있었다. 부산한 거리는 여전히 활기에 가득 차 있었고,나는 여자와 이렇게 마주 서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여자와 헤어진 후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영규는 고등학교 동기이다. 독신인 그 친구는 한 달에 두어번 여자를 샀다. 여자가 집으로 오기도 하고 친구가 찿아가기도 했다. 친구도 나처럼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하긴 지긋지긋한 성욕은 클린턴 대통령마저 섹스스캔달로 곤욕을 치르게 할 만큼 막강하다. 해소할 길 없는 정욕 때문에 괴로운 인생이 어디 한 둘이랴. 친구는 그러나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서두르게 된다. 상대방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노리개로,도구로 이용할 뿐이니까. 그 만남은 영혼의 교류가 없기에 끝없이 피곤할 뿐이다. 행위가 끝나면 상대가 꼴도 보기 싫게된다. 참으로 희한한 것이 인간이다. 어떤 여자와는 그토록 황홀한 행위가 다른 여자와의 그것은 더할 수 없이 구역질나게 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다. 두 남녀가 만났을 때 세 개의 만남을 상정할 수 있다. 사각형의 만남, 삼각형의 만남, 원형의 만남이 그것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인 만남이 사각형의 만남이다. 각이 있기에 서로를 찌를 뿐 한 순간도 만족을 주지 못한다. 서로가 아플뿐이다 한 사람은 몸과 마음이 일치하였지만 상대는 아닐 경우,즉 상대방은 여전히 몸 따로,마음 따로인 사랑은 삼각형의 사랑이다. 한순간의 만족은 줄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여 승천할 수 있는 만남,그런 만남이라야 생명과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다시 소생하고 젊어질 수 있다. 원형의 만남이 그런 사랑이다.

어떤 책의 한 구절이다. 친구가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여 두 영혼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사랑이라.‘부러운 일이군’ 나도 그런 만남을 가져 보고 싶었다. 자본주의가 극성을 떠는 시대인 만큼 돈 많은 남자가 매력이 많다고 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이다. 사랑에 대한 갈증은 팽배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찿기 어려운 요즘이다.

친구와 술집에서 나오니 밤이 꽤 깊어 있었다. 거리에 오가는 차량이 뜸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불빛 같은 것이 간헐적으로 번쩍일 뿐이다. 취한 친구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우리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끼리 뭔 재미로 같이 자냐.”

사람이 살만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아마도 서로 정을 나누며 살 때가 아닐까.  타인에게 다가가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시대이긴 해도 나는 타인이 그리웠다. 그리운 타인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명혜, 여자의 이름이었다.

퇴근후 가끔 명혜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영화도 같이 보았다. 우리는 급속히 친해졌다. ‘체면치레’같은 것이 없이 곧바로 사랑의 폭풍 속에 휩싸여 들어갔다. 하루는 그녀와 산타바바라로 놀러갔다. 검은 뿔테 선그라스를 쓴 명혜는 소풍가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하얀 원피스속의 굴곡진 몸매는 고혹적이었다. 30대 중반의 성숙한 여인의 체취에 나의 관능이 소생되는 기분이었다. 불룩한 젖가슴을 보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101 프리웨이는 한산했다. 다우전옥스를 지나 언덕을 넘어서자 탁 트인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멀리 수평선이 보일 듯하고 좌우로 채소며 꽃을 재배하는 잘 손질된 넓은 밭이 보였다. 옥스나드를 지나자 풍광이 달라졌다. 바다냄새가 나는 것같았다. 좌우의 가로수들은 청명한 햇살에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하늘은 더 푸르고 높게 보였다. 눈부신 햇살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하얀 구름은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고, 초록의 잔디 위엔 오색 풍선이 하늘거리는 산타바바라 비치에 도착했다. 넘실거리는 태평양이 시원스레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고, 한가하게 느릿느릿 거니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세상과 문득 화해한 듯이 나의 마음은 한없이 푸근했다. 남녀관계를 섣불리 어떤 잣대로 잴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막한 나의 인생이 그녀로 인해 활기차고 밝아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늘 다니던 지겹고 아무 감흥이 없던 LA의 거리와 사람들이 명혜를 만난 이후 정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키 큰 팜 트리가 미풍에 일렁이고 가슴이 흰 갈매기들이 근심없이 날고 있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보니 마음속의 찌꺼기가 씻겨져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명혜와 나는 별 갈등이나 주저함이 없이 가까워졌다. 파킹랏에서 바다로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명혜는 나의 팔을 끼었다. 그녀가 나의 팔을 낄 때 뭉클하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행복했다는 느낌과 함께.

그날  산타바바라에서 LA로 돌아오면서 그녀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핸드백에서 비퍼소리가 났다.번호를 확인한 명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 남편한테 연락이 온 모양이다. 명혜의 남편은 건축업을 했다. 사건이 터진 건 3년전이었다고 한다. 그는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마셨고 그것 때문에 여자와 자주 다투었다. 그날도 술이 취해 들어온 그는 여자와 심하게 다투었고 화가 나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새벽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은 그날 과속으로 달리다가 사고가 났다. “일찍 병원에 갔더라면 척추를 못쓰게 되지도 다리를 절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 남편은 누워서 세월을 보내고 있어요. 퀭한 두 눈을 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가끔 쓸쓸한 얼굴이 되던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다보면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실직,이혼,사고,병마-지뢰밭같은 인생을 견디려면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울어도 한 번 떠나간 여자와 잘라진 다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자는 발목을 잡혀버렸다. 잦은 음주로 이미 가정은 풍지박산 일보 직전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떠날 수도 없게 된 여자가 가여웠다. 잘못된 부부사이는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다. 빼려고 하니 아프고 그냥 두어도 살은 썩어갈 것이니까.

“참 주착이지요.”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지요.”
나는 그녀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가슴 속의 멍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위로 받고 싶어서다. 타인에게 다가가려면 우리는 달걀이나 뭐 그런 것으로 타인의 멍을 엷게 해주어야한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자는 움칠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숨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나는 몸을 진저리치듯 한 번 떨며 여자의 어깨를 와락 당겨 안았다. 파도소리가 들린다. 허연 포말을 만들면서 해안을 적셨다가 급하게 뒤로 빠지는 바닷물을 보았다. 창세 이후 지금까지 저 파도는 지금 저 모습대로 하얀 포말을 만들고 사라지고 했을 것이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파도는 굉음을 내면서 포효해 보기도 하지만 끝내는 허연 포말로 꺼져 가야하는 것. 그녀와 이렇게 해변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감싸고 바다를 바라보니 우리가 아주 예전부터 연인사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순간적으로 타인의 영혼속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불러도 좋다. 여자는 이제 나에게 타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

모래를 털고 일어나자 쏟아지는 햇볕에 잠시 어지러웠다.
“남는 시간은 뭐하세요?”
불쑥 여자가 물었다.
“뭐, 별로”
나는 여자생각만 한다고 할 수는 없어서 머뭇거렸다.
“요즘은 당신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실 여자와 아무 무심히 벌거벗고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느끼는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사회는 인간에게 ‘생각’을 심어준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어떤 규범과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낌을 억눌러야한다. 울고 싶을 때 마음놓고 울지도 못한다. 아이가 계속 울게되면 부모들이 매를 든다. 느낌은 억압되고 억눌려진다.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행동하도록 길들여진다. 우리 윗세대들은 여자가 너무 밝히면 안된다는 유교적인 교육을 어릴때부터 받아 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욕구를 안으로 삭이는 수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명혜씨”
여자는 말없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늘 제 생일입니다. 집에서 저녁식사하고 가세요.”
“좋아요.”
여자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나에게 기대어 잠시 쉬겠다고 했다. 따뜻하고 촉촉한 숨소리가 내 귓바퀴에 와 닿았다. 운전하는 내내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내 몸이 향긋하게 되어 뭔가 고귀한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의 유배지에 귀한 손님이 왔다. 바퀴벌레가 들끓던 방에 구원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나에게 눈을 뜨고 자기를 똑바로 보라고 했다. 나는 여자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여자의 눈은 맑았다.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비육체적인 부분이 눈이다. 맑은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의 눈빛에 나를 향한 부드럽고 따뜻한 무엇이 느껴졌다.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몸속의 부드러운 관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는지 희고 고운 손으로 내 몸을 어루만졌다. 내가 정신없이 그녀의 젖가슴을 키스하자 명혜는 몸을 꿈틀거리며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고독과 적막이 일순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행복했다. 그녀의 불같이 뜨거워진 몸 속으로 나는 깊이 들어갔다. 서로가  서로의 몸과 마음에 용해되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름답고 새로운 나라의 문을 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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