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의 허와 실

2016.05.02 12:32

김학천 조회 수:143

하나만 생각 했어/ 생각 했어 그래서/상했지만 이제 알/어 사랑이 어떤 건/ 알게 됐어’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그린 시 같다. 그러나 매 항의 첫 글자만 따서 읽어보면‘너 또 속았지’가 된다. 널리 알려진 만우절‘가로 드립’이다.
  첫 글자 말고도 끝 글자나 가운데 글자를 따라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런 건 어떨까?‘그만두고 신 차려 너/아니면 너 구 또 다른/이를 찾아 랑할 거야/맨날 그애만 같이하/니까 정말 속상 각오해’원망스런 마음에 돌아서겠다는 절교의 통고 같지만 실은 가운데 글자 하나씩을 이으면‘정말 사랑해’란 고백이 숨어있다. 애교스럽고 사랑스럽지 않나?
 드립이란 상황과 맞지 않거나 엉뚱한 발언을 일컫는 누리꾼 용어로 애드립에서 변형된 말이다. 자유로운 영혼들을 표현하는 언어로 시작한 애드립은 젊은이들의 톡톡 튀는 감각과 신조어나 은어와 결합하면서 더욱 독특한 인터넷 풍자 문화로 발전해 왔다.
 특히 앞서 말한 가로 드립과 달리 세로 드립은 가로로 여러 행의 글을 써 놓고 각 행의 첫 글자들을 이어보면 대놓고 말하기 껄끄러운 내용이나 드러내 놓고 하기 어려운 비판을 숨겨놓은 일종의 암호문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얼핏 내용은 좋은 듯해 보여도 정해진 드립으로 읽어보면 욕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얼핏 비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정 반대의 내용인 경우도 있단 얘기다.

  해서 부작용도 따랐다. 악플 때문에 소설가 이외수씨가 고소한 학생이 반성문을 가장해 세로드립으로 욕설을 한 악용 사례가 있는 가하면 아놀드 슈워제네거도 의회에 세로드립으로 욕설을 담은 서한을 보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헌데 얼마 전 한국에서 21세기형 압운이라고들 비유하는 이 세로 드립이 화제로 떠올랐다. 보수단체 자유경제원 주최‘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세로드립을 이용해 이승만 전 대통령을 폄훼한 시가 입상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논란이 되면서다.
  최우수상을 탄‘To the promised land’(약속의 땅으로)란 영작 시의 내용은 찬양일색이지만, 매 구절의 첫 글자만 따서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NIGAGARA HAWAII’(니가 가라 하와이)라고 조롱하는 문장이 되었다. 이 전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로 망명한 사실을 빗댄듯하다.
또 입선작인‘우남찬가’라는 한글로 된 시도 세로드립으로 따져보면‘한반도 분열 친일인사 고용 민족 반역자' 나‘한강다리폭파 국민 버린 반역자’등 비판적 문장이 숨겨져 있었다고 해 당선작 취소 소동이 난 것이다.
 허나 이런 드립들은 이 뿐만이 아니고 우리네 생활현장 곳곳에 널려있다. 한 예를 들어 여러분의 책장은 어떠하신지? 가지런히 꽂아진 책들 제목의 첫 글자를 이어보면 예상치 못한 문장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위인전 약용, 사임당, 이팅게일, 디, 명당, 폴레옹, 율곡을 나란히 세워보면‘정신 나간 사나이?’그래도 이건 괜찮은 편이다. 읽기 민망한 끔찍한 경우들도 허다하다.
  그러고 보면 책장의 책하니 정리하는 것도 꼭 장르별이나 취향대로 뿐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공연히 오해 받지 말고 남의 것도 괜스레 오해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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