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여자

2016.07.19 03:53

시스템관리자 조회 수:272

위험한 여자 
 
  그녀는 오르기 위험한 산이었다. 미로와 절벽과 가파른 길엔 무서운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길을 잃기 일수였고 많은 남자들이 실종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의 매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어떤 남자도 그녀의 유혹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루종일, 일주일 내내 그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니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유혹은 넋을 빼가는 것이다. 번지 점프를 하는 것,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것 같은 유혹이었지만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고 눈을 감고서라도 뛰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껴안고 있는 순간은 해가 동창에 빛나는 것처럼 확실했지만 헤어진 후의 느낌은 ‘내가 저 여자를 껴안았던가?’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 곧 사라져버리는 신기루같았다. 분명 1분전까지 홀랑 벗고 같이 있었는데 말이다.참 희한한 여자다. 그녀는 통제 불가능한 최음향이요,기존의 질서를 무너지게하고 상식과 관습을 벗어나게 하는 존재였다. 
 
 마흔 세 살에 재호는 채영을 만났다. 붐비는 인천공항 대합실에서 출발시간에 너무 일찍 나와 남아 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여 어슬렁거릴 때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그 여자의 첫인상은 뭐랄까,신분이 아주 높은 여자와 맞닥뜨린 것 같았다. 품위있고 도도하고 우아한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손을 내밀면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할 여자임을 첫 눈에 알아차렸다.투명한 봄햇살이 비치는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재호는 그녀에에 가까이 다가가  넓은 유리창 너머의 비행기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갸름한 얼굴, 촉촉하고 부드러운 피부,혈색이 좋고 건강하다, 어려보인다. 끝이 살짝 올라간 버선형 코, 도톰한 입술, 볼이 통통하면서도 턱은 날렵했다. 눈은 크고 콧날이 오똑했다. 눈매가 고왔다. 검정 재킷,검정 셔츠,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이 눈처럼 희었다. 가녀리고 섬세한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과 허리,둔부로 흘러내리는 곡선이 환상적이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관능적인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여자는 재호의 인생에 그냥 지나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서늘한 느낌이 머리로 올라왔다. 
 
 생각에 잠겨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깜짝 놀라서 여기 저기 허둥대며 찿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가슴 한 구석이 싸하니 아파왔다.
 
 보들레르의 시 ‘지나가는 여인에게’가 생각났다. 
 
주위에선 귀가 멍멍해지게 거리가 노호하고 있었지.
상복차림의 날씬한 여인이 엄숙한 고뇌의 모습으로,
꽃무늬 레이스와 치맛자락을 화사한 손으로
살짝 쳐들어 흔들며 지나갔었지.
 
조각같은 다리로 민첩하고도 고상한 걸음으로
나는 머리가 돈 사람인 양 부르르 떨며
태풍이 싹트는  납빛하늘같은 그녀의 눈에서
넋을 빼는 감미로움과 뇌쇄의 쾌락을 마셨어
 
번갯불…. 그리고 어둠! 그 시선이 홀연
날 되살려놓곤 한 순간에 지나친 미녀여,
영원의 저승이 아니고는 다시는 못 볼 것인가?
 
딴 곳, 아득히 멀리! 이미 늦었지! 아마 영구히 못 만나리!
그대 사라지는 곳 나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 하니
오! 내가 사랑할 수도 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였거늘!
 
 
  그로부터 한 달 뒤 엘 에이의 커피샵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가 한인타운 6가의 새로 생긴 커피전문점에 들어서자 마악 계산대를 돌아 나오는 여자가 그녀였다. 그는 얼굴이 붉어질 만큼 반가웠지만 그녀가 그런 눈치를 알 까닭이 없었다. 우연한 만남이 부여하는 의미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는 그녀와의 우연한 조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로 작정했다.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여자를 불러세웠다. 
“여보세요” 
여자는 자기를 부르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걸어나갔다. 두어 발자욱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여자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경계하는 눈빛을 띄면서 
“누구시죠?” 했다. 
“아, 한 달 전 인천공항에서 뵈었습니다.”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경계의 눈빛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요. 어떻게....” 
“........”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봄이 되면 개나리가 피듯 혼자 사는 남자가 젊고 이쁜 여자를 찿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는 솔직하게 이유를 말하기로 했다. 
 
“예뻐서요.” 
“............” 
 
그녀는 말없이 그의 눈을 한동안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 볼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명함크기의 종이를 한 장 꺼내어 건네 주었다. 
 
“시간 나시면 한 번 오세요.”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회전문을 열고 사라졌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서있다가 따라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명함을 보니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원시에의 초대’라 재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계문명이 따라 잡기에 버겁도록 빠르게 발전하는 시절이라 아닌게 아니라 옛날이 그립기는 하다. 그러나 자연의 횡포에 알몸으로 던져졌던 문명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모임일까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일주일 후 재호는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섰다. 미국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1번도로를 따라 한 시간 가량 북상했다. 몽환적인 저녁노을이 수평선에 붉게 타고 있었다.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다. 잠시 후에 만날 그녀를 생각하니 저절로 휘파람소리가 났다. 파도소리와 함께 바다냄새가 코에 느껴졌다. 낮과 밤이 바뀌는 저녁시간은 사람을 공연히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산타모니카 해변을 지나 길을 찿느라 잠시 헤맸다. 
 
 
 
   말리부 대저택은 개인소유지여서 일반인들은 갈 수 없는 바닷가에 있었다. 제복을 입은 수위에게 초대장을 보여주니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어떤 장소는 특별히 사람을 설레게한다. 저녁의 붉은 햇살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일상에서 벗어난 곳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기대와 설레임이 가슴을 흔들었다.이름 모를 화사한 꽃들이 만개한 정원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니 덕수궁 석조전 비슷한 대저택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로비와 긴 복도가 보였다. 군데 군데 조각상이 서 있었다. 넓은 로비 중앙에는 청동조각상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스 조각처럼 벌거벗은 건강한 남녀의 조각있었다.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랑의 행위에 열중해 있는 남녀의 얼굴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 얼굴에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었다. 섹스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엔 환희-오르가즘과는 다른-에 가득찬 즐거운 표정이었다. 
 
  넓은 홀에는 파티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세련된 옷차림의 선남선녀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음악이 바뀌자 반라의 무희가 완전히 몰입된 표정으로 춤과 일체가 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중에 보기 드문 미녀가 곁으로 다가와 자리로 안내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재호의 인생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순풍에 돛단 배였다. 시련과 고통은 눈을 씻고 찿아봐도 찿기 어려웠다. 태어날 때부터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옛말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까지 행복한 건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엔 순풍에 돛이었고 고통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뼈대있는 집안의 장손이었다. 경상도 안동에서는 누구라하면 다 알만한 유림의 선비였던 할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 많았다.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이었던 조부는 이재에도 밝아 경제개발이 시작되던 박통때 울산지역에 사두었던 땅이 금값이 되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재력가가 되었다.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한 아버지는 학부시절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고향에서 일주일 넘어 잔치를 하였다. 
재호의 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가슴에 큰 뜻을 품었고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형의 장기는 증권거래였다. 재벌기업 중역들과 사교클럽이나 골프장에서 수시로 만났다.거기서 증권거래소 관계자들에게 고급정보를 수집하여 큰 돈을 쉽게 벌었다. 물론 겉으로만 둥글게 둥글게이지 실상은 우정이 아니라 질투와 증오가 사람들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형과의 대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형의 성공에 대한 말이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성공이라고 역설하는 형의 얼굴이 오랫동안 잊혀지 않았다.형은 동생에게 세상사는 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지만 재호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학 재학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은 원수가 되었다. 많은 재산이 문제였다. 한 푼이라도 더 가질려고 모두가 인격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그러나 착한(?)형 덕분에 자신의 몫을 차지할 수 있었고 물려받은 빌딩관리도 재호대신 자상스럽게 해주었다. 
 재호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자라났으므로 경제적으로 살아남는 문제에 골몰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하나 아쉬울 것 없었고 마음먹어 못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취미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이것 저것 다 해보았지만 ‘여자’만큼 재미 있는 것이 없었다. 재호의 어머니는 극성엄마였다. 중학시절까지는 그는 모범생이었다. 철이 나지 않아서였겠지만 선생님이나 어른이 하는 말씀을 잘 듣고 따랐다. 그러나 고교진학후 사춘기가 시작되고 닥치는 대로 읽은 책과 친구들 덕분에 일찌감치 여자를 알았다.  고등학교 근처인 명륜동에 집을 마련하고 시골에서 참한 식모를 딸려 보냈는데 어느날 재호가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순이를 보자 엉겁결에 그녀를 범하고 말았다. 울고 불고 난리가 있지만 어머니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사건은 유야무야 잊혀지고 식모가 늙수그레한 아줌마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재호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었다. 순풍에 돛단 듯이 매끄럽게 살아온 터라 절망감이나 우울에 빠져 본 기억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두 달 전에 친한 친구가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며칠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친구의 죽음에 그토록 놀랐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변사람들의 부고를 여러번 받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놀라지는 않았었다.강건너 불처럼 아무런 가슴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세상 어디서 불이 나고 사고가 터지고 홍수,가뭄,테러로 사람이 죽었다는 신문에 난 소식으로 알았었는데 친구의 죽음은 아니었다. 죽음이 삶속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한 순간에 쾌활하게 웃던 재천이가 죽었다는 동구의 전화연락에 까무라칠 뻔했다. 며칠 전만 해도 골프장에서 장타를 날리던 힘이 센 그였는데....집채만한 트럭과 충돌하여 순식간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 친구는 고향친구였다.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같은 초등학교,중학교를 다녔다. 단짝이었으며 라이벌이었다. 초등학교3학년때 서울에서 발행되는 어린이 잡지에 재호의 글이 사진과 함께 실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달 뒤 친구의 글이 같은 잡지에 실린 것을 보고 놀랐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힘을 쓰신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사립학교로 바로 전학을 했는데 그 친구도 다음 학기에 올라왔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 정미소와 막걸리공장을 여러개 가지고 있었다. 시내에 극장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친구덕분에 공짜 영화도 많이 보았었다. 아무튼 그는 친구였지만 친구 이상의 관계였다. 그런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간 듯 허전하고 허전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 사건이후 재호는 인생이 무엇인지, 산다는 게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려워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뭔가 중대한 위기라고 느껴지는 것이 마음속에서 생겼다. 실직이나 실연 같은 것이 아닌 ,인생무상이랄까,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그런 느낌이 불쑥 들었다.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죽음은 또 무엇인가, 이런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순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재호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충격속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다니던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당분간 쉬기로 했다.
 
갑자기 실내가 조용해지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홀 전면에 위치한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고 조명이 밝아졌다. 여러 명의 무희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나와 한바탕 춤을 추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무용인지 요가인지 체조인지 구별이 안되지만 아무튼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무대 배경으로 스크린 화면이 나타났다. 봄의 화사한 정원에 꽃들이 만발한 모습과 어린 소녀들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정경이 보였다.이어서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울리며 소낙비가 내리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홍수가 나서 집들이 떠내려가고 태풍에 집들이 날라가고 사람들의 아비규환소리가 아프게 들렸다. 이어서 하얀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떠 있는 태평양의 섬모습이 보인다. 황금물결의 들판, 눈 내리는 겨울 풍경등이 차례로 반복되고 있었고  그 사이에 실오라가 하나 걸치지 않은 건장한 장년의 남자와 먼 곳에서도 금방 눈에 띄는 미녀가  알몸인 채  각 자 그네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퍼포먼스인가?’  
 
 알몸의 배우들이 선정적인 동작을 보이는   전위극을 몇 해전 뉴욕에서 본 기억이 났다. 별 감흥이 없었던 그 때와 달리 지금 눈 앞에 펼쳐지는 연극은 왠지 눈동자가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속에 흘러가는 중에  무대위의 배우들은 서로의 눈을  몹시 사랑하는 남녀의 눈빛으로 그윽히 쳐다보고 있었다. 연기를  잘 해서인지 두 남녀의 눈빛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사이의 정다운 눈이었다. 둘 사이의 감정외에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눈빛,  그는 그런 눈빛을 사랑했다.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 그러나 결혼은 내일을 걱정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순간 행복은 사라진다. 내일을 위해 오늘 무언가를 참는 것-세상은 그런것을 장려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현재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내일 빚을 갚아야하는데 오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영화구경도 못하고 행복을 미루는  것-마음이 즐겁지 않다. 지금 돈이 없는 사람이 내일 빚갚을 돈으로 애인과 영화구경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세상은  빚 갚기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참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재호는 조상에게 감사했다. 충분한 재물로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지 않을 수 있게 많은 재물을 남겨주신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남녀 배우들이 무대에서 성행위를 실제 하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난리 날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것은 섹스수행법이었다. 인도의 카쥬라호의 사원벽면에 새겨진 섹스하는 남녀의 조각상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섹스를 소개하는 연극이었다.  섹스수행법이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육체적 쾌락을 위해 섹스수행법을 이용하는 땡초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때문이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밀하게 섹스를 즐기려는 저급한 영혼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극이 끝나자 사회자의 어나운스가  흘러나왔다. 바깥 마당에서 뒷풀이 모임이 있으니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 궁금했다. 그래서 로비의 안내부스의 직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그에게 ‘뒷풀이 모임에 찿아갈것이니 거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예의 바르게 대답해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질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닷가로 이어진 오솔길에는 히피스타일의 젊은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 손을 치켜들고 브이(V)자를 만들고 ‘피스(Peace)’ 하며 지나갔다. 장발에 선한 눈빛의 청년은 아주 행복해보였다.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걸어가는 그들이 부러웠다. 잘 손질된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나무들마다 탐스럽게 익은 열대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정원의 곳곳에 심어놓은 꽃들에서 바람은 향기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군데 군데 조각상들이 서있었고 가로등의 은은한 빛아래 아름다운 밤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태평양이 보이는 언덕에서  수십명의 무희들이 장작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로테스크한 화장, 탐스러운 긴 머리카락들이 흘러내려 엉덩이를 가리고 있는,반 나체차림의 그녀들이 추는 춤은 아프리카의 원시적 춤인 것도 같고 하와이의 훌라춤 같기도 했다. 쿵쿵대는 북소리와 괴성은 정말 여기가 원시시대 어느 부락에 온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원시에 초대된 손님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같이 춤을 추었다. 언덕 한 켠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고 각 종 술들이 지천으로 놓여 있었다. 재호는 우선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였다. 일상에 매인 도시생활이 지겨워 질 때 한적한 시골이나 산골로 한동안 떠난 적이 있었다. 투명한 햇살,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얼굴과 귀를 적실 때 , 아, 좋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 것처럼 이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옷을 벗어 던지고 춤판에 끼어들어 소리 지르며 몸을 흔들어 대었다.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재호의 등 뒤에서 ‘ 잘 추시네요.’ 라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채영은 같이 춤을 추며 소리 치며 사람들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녀는 파도가 육지로 밀려오듯이 그렇게 그에게 왔다. 
 
 그녀는 탄트라 요가의 강사였다. 세계 곳곳의 아쉬람(사원)에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요가 강습을 하는 여자였다. 여러 나라의 부호,할리우드의 유명배우,중동의 왕족, 중국의 신흥부자들도 그녀를 스승으로 모셨다. 물론 한국의 지배계층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제자가 있었다. 
 
 그날 밤 어떻게 그녀와 몸을 섞게 된 것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재호의 인생에서 섹스의 참맛이랄까, 진정한 운우지락을 맛본 것은 사실이었다. 정말 마법같은 하룻밤이었다. 여자의 몸을 모르는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녀와의 교합은 이상한 황홀함을 느끼게 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다.오래 전에 읽은 최승자 시인의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라는 시구절이 생각났다.
 
내가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를 깨워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죽음으로 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그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사로잡는 무엇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은 부귀영화일 것이다. 큰 돈, 권력, 지위, 명예 같은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것들이 세속적으로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의 매력은 흔히 미모라고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남들이 이쁘다고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는 배우나 모델도 별로 마음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인연일 것이다. 누군가의 영혼에 밝음 혹은 어두움을 드리울 매력을 가진 여자를 만나기는 흔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재호에게 사랑이 찿아왔다. 
 
 40년 넘게 살아온 그에게 사랑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시절 그의 눈동자를 크게 한 홍숙이로 시작하여 고교시절 서클 후배 정란과 대학시절 서너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친구들의 머리속에 온통 취직준비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그는 어떻게  마음에 드는 여자와 자주 만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새장속의 새,우리속의 짐승같은 결혼생활을 누구나 견디며 산다지만 재호는 그러기가 싫었다. 부모님의 성화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결혼한 적이 있었다. 일 년도 채 되지않아 헤어졌지만  자유를 구속하는 결혼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일단 새장속으로 들어간 새가  새장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수많은 총구들이 그 새를 겨냥한다. 
 
  중매로 결혼한 정숙은 현모양처형여자였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규율을 거스린 적이 없는,착한 여자였다. 당시 재호는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방학을 맞이하여 설악산 등반을 하던 중 신흥사 입구에서 대학후배를 만났다. 친구들과 함께 였다. 오랫만에 만난 후배와 즐겁게 이야기한 것이 그토록 질투심을 자극하는 커다란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정숙은 숨겨둔 애인을 만난 것처럼 온갖 비난과 욕설을 쏟아부었다. 어디선가 읽었던‘질투하는 여인네의 독설이 섞인 악다구니는 미친개의 이빨보다도 더 치명적인 독과 같다’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이 구속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재호는 결혼을 한 이후에도 지나가는 이쁜 여자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숨길 수 없었기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숨기고  아닌 척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기로 결심한 후 주위의 비난과 욕설이 엄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규범과 관습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살 수 있다면 굳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개인이 사회에서 아주 벗어나 살 수는 없겠지만 될 수 있는 대로 평행선을 유지하며 살고 싶었다. 그럴러면 결혼은 하지 말아야했다. 온갖 속박이 거기서 출발되는 것  같았기때문이다. 뺀질이 친구들처럼 이중적인 처신을 하며 즐길 것 다 즐기며 살기는 싫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체 폼 잡으며 속으로는 아주 음탕한 변학도스타일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자식은 정말 보기가 역겨웠다. 주위의 반반한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고는지나가지 못했다. 섹스의 어둡고 고통스러운 면은 다른게 아니라 힘의 균형이 깨진  경우이기때문이다. 권력이나 금력으로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관계를 가지려 할 때 기쁨은 사라진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이다.       짝짓기놀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지만  놀이에도 규칙이 있다. 가장 치사한   것이 돈이나 권력으로 상대의 뜻을 강압적으로 꺽는 것이다.  돈이 최고로 우대받는 세상이 되어 스스로 자존심을 꺾는 여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이지만, 아무튼 배우 장자연을 농락한 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사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든 인간이 태어난 곳의 관습과 제도에 구속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과 육신은 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옛날 왕들이 백성들위에 군림한 것은 그들은 힘없는 백성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자는 무치라면서 상식이나 윤리위의 존재처럼 살았는데,인간이라면 누구나 얽매임없이 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다만 몇 몇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지금 그녀의 제자들이 힘과 권력을 가진 계층인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돈과 권력은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해준다. 
 
 지난 십여년의 학교생활이 몇 년 전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귀국후 몇 차례의 개인전과 국전 입상, 그리고 대학 부임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작품활동도 왕성하게 해왔다.그 사이 분에 넘치는 국전 대상도 수상하여 이름도 알리고 승승장구하였는데, 어느날인가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불쑥 허무한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쓸쓸한 느낌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이 무슨 감상인가’  남들이 알면 배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다고 욕하겠지만, 아무튼 그는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3년간 사귀던 희경이와 헤어졌기때문이다. 경탄에서 시작한 만남이 차츰 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로 변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미련없이 헤어졌다. 그래도 꽤나 괜찮은 여자였는데 헤어지고 나니 아쉬웠다. 좋은 여자를 만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성격이 화통하고 내숭도 없고 술도 잘 마셨다.무엇보다 섹스궁합이 좋았다.  ‘보내고 그리워하는’ 황진이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떠남은 두렵지만 황홀하다고 생각했다. 습관화된 것으로부터 떠남은 새로운 것을 맞이할 마음의 여백을 주기때문이다. 그는 연애주의자였다. 지루한 인생이 갑자기 밝아지고 말라비틀어진 일상이 찬란한 세상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는 사랑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영롱한 존재로 바뀐다. 문제는 그 찬란한 빛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그의 가슴을 설레게하는 여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아니라 세상에는 그가 다가가야할 여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그는 양다리걸치기는 하지 않았다. 설레임이 지속되는 동안 한 여자에게 집중하는 것을 신조로 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다보니 연애 자체가 조금 시들해지기도 했다. 맛있는 사과도 많이 먹으면 물리지 않던가. 그러던 중에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보니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생,로,병,사 하는 것이 인간의 갈 길인 것이   가슴으로 체험되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재호는 중학교졸업할 때까지는 모범생이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다. 그런데 대학교 진학때 처음으로 부모님 말씀을 거역했다. 내가 가고 싶은 미대진학을 반대했기때문이다. 어머니는 형과 같이 법대에 진학하여 검사가 되기를 강하게 원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말씀을 듣기 싫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지만 그렇게 살기 싫었다. 그 때 어머니에게 대들면서 외쳤다. ‘엄마는 내가 언제 행복한 지 몰라.’ 그리고 가출했다. 친구집에서 아침밥을 먹을 때 어머니가 찿아왔다. 그 후 재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피카소를 좋아했다. 그의 그림보다 그의 연애담을 처음 접했을때 가슴이 후끈해짐을 느꼈다.
 
 그날 밤 뒷풀이 후 태평양 바닷물이 보이는 해변의 오두막에서 그녀는 재호에게 물었다.
 
 “왜 살고 싶으시지요?”  
 
 무엇엔가 홀린 듯 몽롱한 기분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는 흠칫 놀라서 ‘왜 사느냐?’ 낯선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닌게 아니라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가. 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던 그는  ‘금방 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당신 때문에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글쎄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사는 게 아닌가요?”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호를 처음 본 순간 ‘벽에 부딪친 것 같은 눈빛’을 읽었다고 했다. 인생에 대한 의문,나란 누구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을 그녀는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무서운 여자군, 흘깃 본 사람의 마음을 읽다니’  아무 생각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도 어느 순간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곧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지만 누구나의 마음속엔 왜 사느냐의 대답을 찿고 있다. 다만 문을 두드리는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생이 바둑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18급에서 초단으로 도약하려면 바둑의 정석과  방편을 공부해야 하듯이 인생의 급수를 올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공부를 해야한다고 했다. 
 
창밖의 하얀 파도가 휘몰아치는 풍경을 내다볼 때 
 
“애인 있어요?” 그녀의 당돌한 질문이 귓가에 들렸다.
“ 많았지요.” 
“그럼 섹스 경험도 많겠네요.”
“네,많이 해 봤지요.”
“ 저랑 한 번 해보고 싶지 않으세요?”
 
재호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잠시 당황스러웠다. 아닌게 아니라 늘씬하고 매력적인 그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이란 말이 떠올랐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강처럼 흘렀다. 창 밖의 파도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녀의 희고 고운 손가락이 그의 뺨에 닿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곧 이어 뜨겁고 촉촉한 것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아랫도리가 금방 딱딱해짐이 느껴졌다. 세상에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지만 예상치 않은 일도 가끔 일어난다. 그녀의 손길이 귓바퀴를 지나 목과 가슴을 간지르는 듯 애무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은 욕망이 깃든 몸놀림과는 사뭇 달랐다. 지극히 아끼고 위하는 것을 정성껏 보듬는 듯한 진지하고 경건한 행위로 보였다. 사실 말은 안했지만 그녀도 재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다. 황홀한 꿈을 꾼 것 같은 그날 밤의 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도대체 어떤 여자인가?  분명 호감을 넘어서는 경탄을 자아내게 한 여자였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며 무엇이란 말인가? 스쳐지나가는 바람이나 변화무상한 하늘위의 구름같은 것이 사랑이란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불길일 수도 있다.
 
유학동기인 철민이를 만났다. 그는 졸업후 엘 에이에 주저앉아 결혼도 하고 전공과는 달리 크게 사업에 성공한 친구였다. 웨스턴 길에 있는 찻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오랫만이군, 그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웬 일이냐?”
 
그녀 생각에 사로잡힌 재호는 다짜고짜 
 
“너, 탄트라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냐?”
 
친구는 멀뚱하게 쳐다보면서 
 
“무슨 소리냐?” 며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섹스라는 게 원래 은밀하고 자극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에 친구사이라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어렵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한 번 입 밖에 내면 저마다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헤어졌다.  서점에서 탄트라에 관련된 책을 몇 권 구입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탄트라는 5천년전 인도에서 ‘시바’라는 신이 그의 연인’데비’에게 전수한 방편을 적어 놓은 것이다. ‘왜 태어나고 죽는 것인가?’, ‘지금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이런 특별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해주는 책이다.  보통사람들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곧 잊어버린다.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해야 하기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끝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을 ‘구도자’라고 한다는 것을 재호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섹스에너지를 이용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데에 깜짝 놀랐다. 섹스는 자식을 얻거나 혹은 쾌락에 관계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구도의 방법으로도 사용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말리부의 모임은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비밀모임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떠나기 전에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어디로 떠나는데요?”
 
“내일 만나서 말씀드리지요.”
 
약속장소에 가니 그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재호를 감탄시키는 미모였다. 세련된 정장에 고급스런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요약하면 그녀는 출가한 비구니나 수녀같은 신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력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학교 2학년때 부터 열성적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자와 결혼했는데 결혼 5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그것때문에 헤어질 수 밖에 없었고 많이 방황했다는 것. 지금 재호가 느끼고 있는 인생무상이랄까, 삶과 사랑,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때문에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다가 인도에서 우연히 탄트라 마스터를 만났다는 것,거기서 몇 년 수련을 거쳐 탄트라요가의 강사가 되었다는 것을 조용히 이야기 해 주었다. 
 
어린 시절 꽃밭의 채송화나 다알리아,봉선화,맨드라미,나팔꽃이 아름다워 가까이 다가가서 꽃잎을 만져보고 코를 대어 냄새를 맡아 본 기억이 있었다. 호감,관심,흥미를 느낀 대상에게 사람들은 다가가고 싶어한다. 꽃잎을 더 알아보기위해 어떤 이는 꽃을 찟거나 짓이기기도 한다. 삶의 진실에 다가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모든 것이 안개속 같이 뿌여지는 것을 느꼈다.이 세상은 금기와 금지가 너무 많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 왜 이리 복잡하고 얽매이는 것이 이토록 많은가. 누구말대로 별것도 아닌 인생이 왜 이리 살기가 어려운가하는 아픔인지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경전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해야하는데 오히려 발목을 잡는 경우는 없는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세상이지만 그래서 금기와 비밀이 생기고, 이래 저래 산다는것은고통이다.그녀에게 속세로 돌아오면 안되겠느냐고 사정했다. 왜냐하면 그녀를 보자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생활이 좋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을 수는 없지만 영혼의 아이(제자)를 낳을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는 그를 연민에 가득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도 당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녀가 다른 남자와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졌다.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녀를 독차지 하고 싶다는 열망이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질투심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그렇다쳐도 미래에도 요가수행을 해야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자때문에 밤잠을 설친 적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서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괴로운 적이 없었다. 무엇이 진실인가,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것인가. 사랑하고 싶은가. 하룻밤의 추억으로 생각하고 돌아서 버리면 될 것을 왜 이다지 괴로워하는지 그는 몰랐다. 사랑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팜므 파탈,황진이가 불현듯 생각났다. 
 
 
 일주일 뒤 그는 그녀가 머무는 티벳으로 떠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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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의사랑(백남규) 16.07.1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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