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복(福持福)대로

2016.12.19 10:37

성민희 조회 수:125

복지복(福持福)대로

 

 

  엘에이에서 서울까지. 열 세 시간의 비행이 거의 끝나간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던 사람들이 지리한 여름 한 낮 귀퉁이를 뚝 잘라 낮잠이라는 달콤한 여행을 다녀온 아기처럼 꾸무럭거리며 일어난다.

 

  오늘은 다행히 비행기가 만석이 아니라 군데군데 빈 좌석이 많다. 나도 3인용 좌석에 중간은 비워둔 채로 왔다. 발밑에 두어야 할 핸드백도 옆자리에 올리고, 읽을 책도 던져두고 신이 났다. 그런데 나보다 더 신나해야 할 사람이 바로 앞좌석에 있다. 달랑 여자 한 사람만 앉았다. 처음엔 복도 많구나 싶었다. 번듯이 누워가도 되겠구나, 샘도 났다. 그런데 여자는 길고 긴 시간 내내 자기 자리만 꼿꼿이 지킨 채 옆의 텅 빈 두 자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왔다. 좁은 자리에서 이리뒤척 저리뒤척한 나보다 더 쓰레기통에 버려진 원고지처럼 구겨져 있다.

 

  여고 2학년 때 우리 반 급훈이 ‘복지복(福持福)대로’였다. 각자 분복이 정해져 있으니 받은 복을 충만히 누리며 살자는 담임선생님의 철학이었다. 키가 커서 그때 한창 유행하던 ‘키다리 미스터 김은~’ 하며 놀림을 받던 선생님이 오늘 뜬금없이 생각난다. 컴퓨터가 정해준대로 앉아야하는 우리들의 운명(?)에 3인승 좌석을 혼자 독차지하는 행운을 거머쥔 그녀.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엄청 부러웠는데, 지금 내릴 준비를 하면서는 오히려 쯧쯧 측은한 마음이다.

 

  주위에서 자신이 가진 환경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많이 본다. 젊을 때에는 기댈 데도 없는 허허 벌판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벋어야 한다는, 디아스포라의 강박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의 발자국 깊이와 넓이가 보일만큼 살아온 요즘, 돌아보면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형편이 아무리 나아져도 그 속에 풍덩 빠지지 못하고 현실에 만족을 못하는 마음 때문이다.

 

  금요일 오후에 은행에 가면 무척 복잡하다. 히스패닉들이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하기 위해 몰려오기 때문이다. 주급으로 일주일을 살아야 하건만 주말 저녁마다 그들은 맥주 파티를 벌인다. 저축을 못해도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해도 그들은 가족과 함께라면 행복하다. 옛날에는 그들의 삶이 몹시 불안하고 무절제한 것 같이 보였는데 이제는 어쩌면 그들이 더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미래를 위한 준비가 없는 것 같지만 달리 보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그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 모든 사람에겐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

한 때 나 자신이 몹시 못마땅한 때가 있었다. 공부를 더 해야할텐데, 이렇게 사는 것은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닌데 하는 아쉬움으로 현실에 충분히 젖지를 못했다. 내 자리에 두 발을 디디지 않고 붕 마음을 띄워놓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이게 나야. 내 수준이야. 현실은 나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 순간순간 내가 선택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으니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나의 선택은 바로 나의 수준.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나의 현실이 바로 나다.

  이 후로 나는 두 발을 땅에 내디뎠다. 더 이상은 구름 너머에 마음을 올려놓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분복대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란 자각도 한다.

 

  이 순간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내 삶이 시간 가운데로 빠져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삶의 촛불이 매순간 죽음을 향하여 타 내리고 있다 생각한다면, 손바닥에 남은 모래의 양과 타다 남은 초의 양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달리던 마라톤 트랙의 끝이 보인다면, 테이프를 끊고 들어서면 내 팔을 잡아 등수 쪽지를 턱턱 등에 붙여줄 사람들이 저 멀리 보인다면……. 그 모든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엄연한 현실이다.

  어떤 친구가 말했다. 예전에는 ‘월화수목금토일’ 이렇게 가다가 어느 날 부터 ‘월수토’로 가더니 이제는 아예 ‘월토’ ‘월토’로 일주일이 간다고 한다. 세월은 이렇듯 빠르게 흘러가지 않는가.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에 순응하지 않고 내 현실에 좌정하여 누리지 못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여자가 일어나 구겨진 담요를 털털 털어 의자 위에 던진다. 사용한 베개도 그 위에 얹는다. 우리네 인생도 하늘나라로 갈 때는 모든 것을 두고 갈 터인데, 내게 주어진 현실을 최고로 누리고 최대로 즐길 줄 하는 것도 삶의 지혜다. 복지복대로. 주어진 분복대로 누리면서 살 일이다.

 

<펜문학 2016.11.12월호> 134호

<경남여고 90주년 기념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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