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질'(虎叱)이 현실이 된 세상

2016.12.28 05:00

김학천 조회 수:119

 산 속에 밤이 되자 우두머리 호랑이가 부하들과 저녁거리를 의논하고 있었다.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구심이 나고 무당의 고기는 어쩐지 불결하게 느껴졌다. 해서 청렴한 선비를 먹기로 하였다. 
 마침 호랑이들이 마을로 내려올 때 유학자입네 하는 북곽 선생이라는 자가 열녀 표창까지 받은 이웃 과부 집에서 그녀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과부에게는 성이 각각 다른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이들이 방안의 동정을 살피다가 필시 이는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가 온 거라 여기고 몽둥이를 들고 뛰어들었다. 
 이에 놀란 북곽 선생은 허겁지겁 도망쳐 달아나다가 그만 똥구덩이에 빠졌다. 간신히 기어 나왔는데 어럽쇼?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북곽 선생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비는데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그의 위선과 아첨 등을 크게 꾸짖고는 가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날이 새도록 정신없이 빌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이른 아침 농사일을 하러 가던 농부들만 주위에 둘러서서 어찌된 사연인지 물었다. 엎드려 있던 그는 일어나더니 '하늘이 높다 해도 머리를 어찌 안 굽히겠으며, 땅이 비록 두텁다 하나 어찌 조심스럽게 딛지 않겠는가'라며 근엄한 얼굴로 변명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호질(虎叱)' 얘기다.
 북곽 선생은 점잖고 인격 높은 유학자인양 유세를 떨지만 실상은 음란한 호색가였고 정절부인으로 포장된 여인은 성이 다른 다섯 아들을 둘 정도로 음탕한 요부였던 거다. 이는 곡학아세하며 일신의 영달과 안주만을 위해 권세를 추구해온 저네들이 짐승들보다도 더 간교하고 사악한 본보기였음이다. 그러니 산중의 맹수라는 호랑이조차 '너희 인간들보다 더 구리고 더럽고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피해 달아났던 게 아니었겠는가! 
 이렇게 호랑이가 꾸짖고 폭로한 이들의 위선과 가식적 행위는 작금의 권세가들의 모습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그래서 그런가? 요즈음 한국에서는 TV 예능프로나 드라마를 안본 지가 오래 됐다고 한다. 이런 프로그램들보다도 더 현실 같지 않은 막장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 속에서는 계산하기도 힘든 엄청난 돈이 오갔는데도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 대가나 사심 없는 순수한 마음이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엉터리로 일류대학에 들어갔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또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아 법적으로 당당하게 피해가는 최고의 엘리트 얘기도 있다. 
 무엇보다 차가운 바다 속에서 어린 생명들이 스러져가는데도 위에 보고할 영상을 찍기에 바빴다던 슬픈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뿐인가?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주사를 맞은 사람은 있다는데 그 주사를 놓은 사람이 없단다. 참으로 기이한 일들 천지다. 
 시인 이성복은 '아무도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탄식했다. 모두가 감출 수 없는 진실에 눈감고 귀 막은 자들뿐이어서 일까? 아니면 병이 너무 깊어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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