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그렇다.

2016.12.29 18:34

성민희 조회 수:515

어머니는. 그렇다

 

어머니 집에 가면/ 새실 한약방에서 얻은 달력이 있지/ 그림은 없고 음력까지 크게 적힌 달력이 있지/ 그 달력에는/ ‘반나잘’ 혹은 ‘한나잘’이라고/ 삐뚤삐뚤 힘주어 기록되어 있지/ 빨강글씨라도 좀 쉬지 그려요/ 아직 까정은 날품 팔만 형께 쓰잘데기 없는 소리 허덜 말어라/칠순 바라보는 어머니 집에 가면/ 반나절과 한나절의 일당보다도/ 더 무기력한 내가 벽에 걸릴 때가 있지./ (박성우의 ‘반나잘 혹은 한나잘’ 전문)

 

  시골집 낮은 처마와 툇마루 사이의 허연 벽. 빛바랜 가족사진 액자 하나가 방문 위에 동그마니 걸려있다. 큼지막한 글씨에 군데군데 태극마크가 빨간 숫자를 안고 있는 달력도 걸려있다. 시인은 고향집에 들어서며 어머니의 삐뚤삐뚤, 연필심에 침을 묻혀가며 쓴 글씨를 달력에서 본 모양이다. 어머니는 큰 숫자 아래에다 한나잘, 반나잘 일당 받고 일할 날들을 표시해 두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이건만 아직도 날품을 팔아야하는 형편이 시인은 마음 아프다.

  머리에서 수건을 벗어 옷의 먼지를 탁탁 털어내는 어머니에게 시인은 퉁명스레 말한다. 그저 휴일만이라도 좀 쉬지 그려요. 어머니는 안다. 이 나이 되도록 무기력한 시간만 굴리고 있어서 죄송혀요. 죄송혀요... 하는 아들의 마음을. ‘아직 까정은 힘이 있응께 쓰잘데기 없는 소리 허덜 말어라’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을 위로한다.

 

  37년 전. 내 부모님은 중학생 막내 동생을 데리고 이민을 오셨다. 해가 어스름한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와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를 보며, 동생이 그랬다. “엄마, 지금 내 형편으론 엄마보고 일 하지 말란 말은 못하겠는데요... 일 조금씩만 하세요.” 이제 겨우 열 네 살 아들의 말이 환한 등불이 되어 그날 밤 내내 어머니의 마음을 밝혀 주었다. 그때 어머니도 그렇게 대답하셨을 거다. “집에 있으몬 뭐하노. 고마 재미 삼아 나간다아이가.”

 

  몇 년에 겨우 한 번씩, 멀리서 세배하러 오는 막내 등을 쓰다듬으며 내 어머니는 지금도 그 때의 그 아들 때문에 눈물 나게 행복하다. 어머니는. 그렇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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