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집에 쌓는 보석

2017.05.25 21:06

성민희 조회 수:49

Dr. Berke 가 병원을 지키는 이유

 

성민희 janelyu36@gmail.com

 

 

Dr. Berke가 많이 변했을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 미소는 그대로인데 광대뼈 아래로 낯 선 우물이 패이고 하얀 이빨보다 입가의 주름이 더욱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굵은 바리톤의 음성은 한결 얇아지고 둔탁하다. 무심하게 밀려와 모래톱을 사정없이 쓸고 가는 파도처럼 세월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모질게 훑어내고 가버렸다.

 

이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하여 처음 심장내과의 문을 들어섰던 때가 20여 년 전이었나 보다. 그 때는 진료실이 많이 붐볐다. 예약을 하고 왔는데도 신문이나 잡지에 눈을 꽂고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대 여섯 명의 간호사와 기다리던 환자 모습이 잔영처럼 남아있는데 지금은 턱이 세 겹이나 되는 늙은 백인 여자 혼자서 나를 맞이한다. 텅 빈 대기실에 맥없이 걸린 시계. 겉장이 꼬질꼬질한 잡지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마주보고 앉은 Dr. Berke가 누렇게 변색된 내 챠트를 뒤적인다. 마치 멀리 갔던 자식을 마주하고 앉은 듯 오랜만이군, 한다. 이제 괜찮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기 전인데도 어제 작성한 진료기록인 양 들여다보며 묻는다. 자신은 벌써 여든 살을 바라본다고 한다. 나는 환자의 말을 잘 들어줘. 잘 들어주는 의사가 좋은 의사야. 요새 젊은 의사들은 바빠서 그런 배려가 없지. 나는 이 자리에서 벌써 40년째야. 옛날의 그 책상에 그 의자. 그 위에 앉아있던 똑 같은 그때의 그 사람인데 말투나 표정은 전혀 다르다. 의자에 푹 파묻힌 몸을 책상 앞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은 다시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온 몸으로 하는 것 같다.

 

그는 서울에서 근무한 군의관이었다. 예쁜 한국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는, 처음 만났을 때 하던 말을 오늘 또 한다. 남편의 뒤에 서서 주사기를 받아들며 소리 없이 미소를 짓던 여자가 생각난다. 영어를 못하는 한국 환자를 위해 친절하게 통역을 해 주던 아내는 칠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병원 구석구석에 배여 있는 그녀의 손길을 떠날 수가 없어 아직도 병원 문을 열어두고 있다.

 

옛날처럼 EKG를 찍고 런닝 머신 위에서 뛰는 테스트를 모두 마쳤다. 옛 사람을 한 번 더 본 것만으로도, 아직도 당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진료비는 사양한다. 그때의 그가 심장전문의로서 유능한 의사였다면 지금은 서민들에게 무료로 진찰을 해주고 처방전을 써 주느라고 해마다 라이센스를 갱신하는 따뜻한 의사다. 아니, 이제는 의사가 아니라 아버지이고 할아버지다. 매일매일 추억을 되새김질 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사랑은 베푸는 할아버지.

 

Dr. Berke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지나간 시간 속에 묻혀 있는 좋은 기억은 현재를 더욱 촉촉하고 건강하게 해 주는구나. 우리의 육체가 허물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지만 무너지는 육체에도 요동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영혼의 풍요로움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의식 어느 곳에 집을 지어놓고 절대로 늙지도 바래지도 않은 채 긍정적인 기운을 무한히 공급해 주는 것이다.

 

작년에 26년을 살아온 이층집에서 단층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나이가 더 들어서 몸이 거동을 못할 때까지 살아야 할 우리 인생의 마지막 집이라며 리모델링에 정성을 쏟았다. 이사를 하기 전 약 한 달 반 동안 노인이 살기에 편리하도록 집의 구조를 모두 고쳤다. 왁자거리며 일하는 젊은 일군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먼 훗날 이 집에 살고 있을 여든 살의 민희야, 예순 살의 민희가 너를 위해서 지금 이렇게 분주하구나. 너가 조심조심 사용할 샤워장 벽에 손잡이 봉을 붙이고 한 쪽 코너에는 의자도 만들었다. 혹 다니다가 넘어질까 봐 턱이 지는 문은 모두 없애고 온 집의 바닥 높이를 똑같이 맞추었다. 어느 외로운 날이면 저 근육질 히스패닉 청년이 오직 너를 위하여 땀 흘리는 오늘을 추억하렴.’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나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그때는 노년의 삶을 위해서는 집을 편리하게 리모델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보수하고 꾸미고 채워야 할 집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준비는 추억의 창고를 가득 채우는 작업이다. 마음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담는 일, 그것이야말로 암만 꺼내어 봐도 싫증나지 않을 내 삶의 귀한 보석이다. 쓸쓸한 내 영혼을 띄워놓고 아무리 헤엄쳐도 지치지 않을 평화로운 바다다.

 

부인이 만들어 주는 김치부침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던 Dr. Berke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것 또한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좋은 추억이다. 어느 한가한 날 김치부침개를 만들어 한 번 더 병원을 찾아가야겠다. <수필시대 2017. 1> <대구일보 5월 19일>

 

 

[이 아침에] 기억의 집에 쌓는 보석


성 민 희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17/05/23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7/05/22 20:09
 
닥터 버크가 많이 변했을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 미소는 그대로인데 광대뼈 아래로 낯선 우물이 패이고 하얀 이빨보다 입가의 주름이 더욱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심하게 밀려와 모래톱을 사정없이 쓸고 가는 파도처럼 세월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모질게 훑어내고 가버렸다.

처음 심장내과 문을 들어섰던 때가 20여 년 전이었나 보다. 그 때는 진료실이 많이 붐볐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대 여섯 명의 간호사와 기다리던 환자 모습이 잔영처럼 남아있는데 지금은 턱이 세 겹이나 되는 늙은 백인 여자 혼자서 나를 맞이한다.

마주보고 앉은 닥터 버크가 누렇게 변색된 내 차트를 뒤적인다. 마치 멀리 갔던 자식을 마주하고 앉은 듯 오랜만이군, 한다. 옛날의 그 책상에 그 의자. 그 위에 앉아있던 똑 같은 그때의 그 사람인데 말투나 표정은 전혀 다르다.

그는 서울에서 근무한 군의관이었다. 예쁜 한국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는, 처음 만났을 때 하던 말을 오늘 또 큰 소리로 말한다. 영어를 못하는 한인 환자를 위해 친절하게 통역을 해 주던 부인은 칠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병원 구석구석에 배여 있는 아내의 손길을 떠날 수가 없어 아직도 병원 문을 열어두고 있다.

옛날처럼 EKG를 찍고 테스트를 모두 마쳤다. 옛 사람을 한 번 더 본 것만으로도, 아직도 당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진료비는 사양한다. 그때의 그가 심장전문의로서 유능한 의사였다면 지금은 서민들에게 무료로 진찰을 해주고 처방전을 써 주느라고 해마다 라이센스를 갱신하는 따뜻한 의사다. 아니, 이제는 의사가 아니라 아버지이고 할아버지다. 매일매일 추억을 되새김질 하면서 거기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사랑은 베푸는 할아버지.

닥터 버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지나간 시간 속에 묻혀 있는 좋은 기억은 현재를 더욱 촉촉하고 건강하게 해주는구나. 육체가 허물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요동하지 않고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은 영혼의 풍요로움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의식 어느 곳에 집을 지어놓고 절대로 늙지도 바래지도 않은 채 긍정적인 기운을 무한히 공급해 준다.

작년에 26년을 살아온 이층집에서 단층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이가 더 들어서 몸이 거동을 못할 때까지 살아야 할 우리 인생의 마지막 집이라며 이사를 하기 전 한 달 동안 리모델링으로 정성을 쏟았다. 그때는 노년의 삶을 위해서는 집을 편리하게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그러나 오늘은 보수하고 꾸미고 채워야 할 집이 하나 더 있다는 생각을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준비는 추억의 창고를 가득 채우는 작업이다. 마음속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담는 일, 그것이야말로 암만 꺼내어 봐도 싫증나지 않을 내 삶의 귀한 보석이다. 쓸쓸한 내 영혼을 띄워놓고 아무리 헤엄쳐도 지치지 않을 평화로운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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