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강촌에서 자란 아이

2017.08.16 06:44

김태영 조회 수:76

내 마음 속 유리창을 본다. 세월의 흔적 때문에 성애가 낀 듯 흐릿해진 창들 속에 유난히 맑은 창 하나 열려 있다. 단발머리 소녀가 논둑에 앉아 나물을 캐고 있다. 일어서서 강을 바라 본다. 바람이 갈대 숲에서 달려와 치마 속으로 들어 간다. 짧은 치마가 방방해 진다. 아이는 새가 되어 강을 거슬러 날아 간다. 하얀색이다. 강의 표면이 은빛으로 빛난다. 반짝이던 물방울이 별이 되어 따른다. 붉은 하늘 저 편 해가 사는 곳으로 소녀는 사라 진다. 강에서 하늘까지 다리 하나가 새로 생겼다. 무지개 같다.


어린 날의 내 모습은 신비스럽다.


사람의 인성이 열 세 살 까지 결정지어 진다고 볼 때 나는 그 나이까지 영산 강이 있는 강촌에서 살았다. 나의 오감은 그 곳에서 발달 되었다. 강변에는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에 나오는 얘기들이 얼마든지 저장되어 있었다. 강은, 아니 강둑은 그 언저리는 나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 가슴을 활짝 열어 그 비밀을 보여 주었다. 강은 내 어머니와 함께 나를 길러 냈다. 내 정신세계의 바탕화면엔 하얀 강줄기와 파란 하늘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다. 강가 논두렁에서 나물 캐는 소녀의 모습은 기억 속의 주인공이다. 꽃 자주색 옷고름에 새하얀 앞치마 입은 젊은 내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내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들로 나가기 시작하던 시절은 ‘삼천리 강산에 새 봄이 왔어요. 농부는 밭을 갈고 시를 뿌린다’는 노래가 아이들 사이에 유행 했었다. 보릿고개를 넘던 전쟁 후의 세월이었다. 밥 대신 나물을 캐다가 배를 채웠건만 그것이 가난인 줄을 몰랐다. 아기 업고 공부하는 일에서 해방되어 강둑으로 달려 나가는 일이 기쁘기만 했다. 나물바구니를 붙잡는 순간 자유가 주어졌다. 고무신 바닥에 닿는 논둑 길의 촉감은 쑥떡에 버무리던 콩고물 같이 황홀 했다. 


겨울은 그림자 하나 없는 정지 된 시간의 연속이라고 기억 된다. 빈 산의 정적이 흰 눈과 함께 마을을 뒤덮었다. 날마다 마루 끝에 꽁지 발을 세우고 강 쪽을 바라 보았다. 강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봄 재미나게 놀았던 일들을 모두 잊었는가? 안타까운 마음에 주저 앉으면 기적소리가 들렸다. 강 건너 아주 먼 곳 안개가 집을 짓고 사는 마을에 기차가 지나 가고 있는 것이다. 목포와 광주를 오가는 통학열차라 하였다. 기차는 미지의 세계로 길게 뻗어 있는 내 마음 속 통로를 지나 가는지 기적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새벽에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강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 강이 울고 있네 잉.”

“얼음장 깨지는 소리라네. 봄이 올라고”

    꿈 속인 양 들려오던 ‘봄이 올라고’는 희망이었다. 기쁜 소식 가져오는 엽서였다. 동시였다. 

얼음이 산산이 부서질 때마다 신음 하던 강 울음 소리는 봄이 오는 노랫소리로 들렸다. 

그렇다 하여도 봄은 무척 더디게 왔다. 내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북 쪽 어느 먼 나라에서 아직도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기쁜 소식이 나에게 올 때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와서 나를 시험 한다. 행복 또한 그렇다. 불행이란 얼굴 뒤에 단단히 숨겨진 그것을 찾다가 포기 해 버린 사람에겐 결코 보여 주는 법이 없다. 봄을 맞으려면 창자 속까지 추운 겨울을 건너야만 했다. 찬물만 마시고도 온종일 고무줄 놀이를 했던 우리들은 배고픔 보다 놀 곳이 없어 우울 했다.

   

강이 울음을 그쳤을 때는 봄이 우리 집 텃밭에 당도해 있었다. 작년에 남겨 두었던 배추뿌리에 새 순이 돋았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발그레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어린 여자애들은 바구니를 들고 코뿔소 같이 강둑으로 내달렸다. 

“오줌 눌 때 조심 해라잉”

어머니들의 당부가 꼭 뒤따라 왔다. 논둑에 오줌 누던 처녀가 배암 새끼를 낳았다는 소문은 우리를 질리게 했다. 까무러치게 하는 소문은 또 있다. 소록도에서 온 문둥이들이 섭섭이네 집에 와서 그의 오빠 공팔이를 내놓으라고 깽 판을 부린다는 것이다. 공팔이가 글쎄 문둥병 환자라 하지 않은가! 금동양반은 비 오는 날 밤 도깨비한테 홀려 공동묘지에 자빠져 자다가 죽을 뻔 했다는 얘기는 진짜로 판명 되기도 했다.

“옥순아, 가시나야! 가랑이를 쫘악 찢어놓기 전에 언능 와서 애기 안 볼래?”

욕쟁이 옥순 어미가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악을 써댔다. 달리기 잘하던 그의 딸은 벌써 나물이 제일 많은 논두렁을 타고 앉은 뒤였다. 외국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욕 소리 마저 그립다. 염병허네.  지랄허고 자빠졌네 이런 욕들은 차라리 우스개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참 독하고 몹쓸 소리도 많았던 세월이었다. 

   

어린 나는 강물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했다. 그 깊이 또한 알 필요도 없이눈에 보이는 한 토막의 강 줄기를 무척 사랑 했다. 나는 멈추어 있고 그것은 흐르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 때문이었다. 흐르는 것은 자유롭다. 나는 일찍이 자유를 숭상 하였던가 보다. 강물이 갈대 잎 피는 둔덕을 때리며 여기가 아니고 저기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고 소곤거렸다. 강물이 찰랑댈 때마다 나의 정신은 놀라 깨어나곤 했다. 강촌 조그만 가시나 에게 설렘이 싹트기 시작 했다. 

  

그리움을 품기 전까지의 나는 행복 했었다. 괴로움은 손가락 끝에서 칼 끝으로 재빨리 흘러 내려가 순식간에 나물 하나를 캐 올리곤 하였다. 소리도 없이 자기 몸을 내어 주던 대지가 나를 영원히 사랑 한다고 속삭였다. 내가 어느 곳에 있던지 틀림없는 자기의 딸이라고 하였다. 나는 내 어머니가 된 대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먼 곳, 아주 멋진 세상을 꿈꾸느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이민 오기 바로 전까지 끝도 없는 신작로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영혼이 미지의 세계를 멀리 바라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 하게 되었다. 무엇에 홀린 듯 달려 가서 강가에 서 있는 날이 많아졌다.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바람과 입을 맞추었다. 바람의 약혼녀가 되었다. 바람은 내 편이라서 내 등을 떠밀어 주었다. 나는 새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안개 강을 건너 통학 열차를 따라 꿈 속에 그리던 광주도 가 보았다. 집 채만한 연락선이 연기를 뿜고 있는 목포 항구도 방문 하였다. 이것을 일일이 일기장에 남겼으니 

글쓰기의 시작이 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나의 상상력은 비 온 뒤 죽순 자라듯 맘껏 자랐다.


썰물 때가 되면 드디어 강 가운데로 들어가 조개를 잡았다. 깊이 들어가면 많은 조개를 건질 수가 있었지만 위험 했다. 나는 딴 아이들 보다 무서워하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몸이 떠오르면 강물이 나를 받쳐 준다고 굳게 믿었다.


어찌해 볼 수도 없이 사는 일이 팍팍 할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빈 손 만 남았다 할지라도 영산 강으로 돌아 간다면 멋지게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간직 하고 살았다. 이제 그 강이 아니라느니 내가 젤 좋아하던 쓴나물 같은 건 찾아 볼 수도 없다느니 이런 얘기는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내 마음 속 영산 강은 초등학교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있다. 


나는 흐르는 강을 사랑 하였기에 이처럼 먼 이국 땅에 와서 외로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그렇다 하여도 후회는 없다. 강의 품은 넓고 깊다. 물고기를 기르는 일 말고도 수많은 생물들이 살도록 넉넉하게 곁을 내어 준다. 무엇 보다 상상력의 보물창고를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을 길러 낸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었을 때 한 번도 울어 본 적 없는 듯 해맑은 얼굴로 천천히 흘러 가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작 볼 수 없는 것이다. 눈물 뒤에 웃음이 감추어져 있듯이 절망 뒤에 희망이 빛나고 있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니 가난도 폼 나게 즐겨라. 인생살이라는 여행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을 뽑아 낸다. 이런 교훈은 영산 강에서 배웠다.


하늘 아래 쬐그만 강변마을 내 고향의 바람, 하늘, 강물, 그 냄새까지 내 몸 속에 그대로 흐르고 있음에 나는 감탄 하며 행복해 한다.


(끝)    


김태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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