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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독한 사람 하지만 멋있는 사람

2017.12.24 06:55

이효섭 조회 수:99

독한 사람 하지만 멋있는 사람

 

요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 갈려고 노력한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하루를 열심히 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힘든 시간에 내가 옆에 있어 위로와 도움이 되었다는 감사의 편지를 받을 때는 더욱 보람을 느낀다.

장의사라는 직업이 산부인과 의사처럼 꼭 필요한 분야이지만 문화적으로 관념상 선호하는 직업이 아니기에 종사하는 전문인이 적고 결과적으로 동포 모두가 응당 알면 도움이 될 상식도 모르고 살아 간다. 내가 이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 제2의 인생을 살기에 노년의 삶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내가 느끼며 깨닫는 것을 나눌 때 주위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많은 분들이 나는 자다가 조용히 하늘나라 가기를 기도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가끔 그런 복된 사람의 모습을 보지만 생로병사라는 말이 존재 하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 대부분이 만연하는 병마와 싸우다가 이 세상 삶을 마친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인가 보다.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온 시신을 가까이 대하면 그들 몸에 남겨진 평생의 흔적을 볼 때 그들 평생의 삶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2차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본다. 특히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부고를 받고 환송예식에 조문하면 예쁘게 화장하고 누워있는 고인을 본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일반의 삶 속에서 격리되었다가 미화된 죽음을 보며 죽으면 다 저렇겠구나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숨질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나는 내가 한 평생 의지하며 살아온 육신의 마지막 모습이 이렇지는 않으면 좋겠다 혹은 내 마지막 날들의 과정이 이렇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 들 때가 많다. 내가 언젠가 글을 쓰면서 양로원 출입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렇다. 나와 직접적인 가족이 없으면 양로시설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기에는 몇 년 후 나의 모습이 있고 생각을 회피하려는 미래의 현실이 있다.

우리 모두 그 시점에 이르면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를 지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죽음이란 생리적으로 마지막 숨을 내 쉬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 경제적인 죽음을 겪으며 사회적인 죽음을 지나 온다. 다시 말하면 삶의 의미는 미미한데 연명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본인보다는 주위 가족들이 결정하는 것을 본다. 한 할머니께서 계셨다.  80대 중반에 콩팥의 기능이 다하여 투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자식들은 당연히 올바른 결정을 한다고 믿고 합의하여 모친의 투석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5년 여 동안 투석을 받으시며 힘든 고통 속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면 투석 시작하지 않았다고 입 버릇처럼 말씀하였다. 비슷한 이런 경우도 있었다. 고령의 부친께서 영양을 튜브로 받아야만 연명하게 되어 역시 자식들이 도리로서 결정을 하였으나 시설에서 의식 없이 장기간 누워 계시기에 나이가 함께 깊어가는 자식들이 아버지가 살아 계시지만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불행스런 말을 듣기도 하였다. 이렇게 자식들에게 까지 외면 당하며 의식 없이 살아 갈 경우가 발생 할 수가 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미래를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마지막 날들을 삶의 존엄성을 지키며 보낼까? 혹은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 할 까?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읽은 한 권의 책, 한 사람의 삶이 저의 눈 앞에 큰 섬광처럼 나타났다.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라는 책이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이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는데 첫 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준비해온 죽음을 맞아들인 그들의 삶은 귀한 깨달음을 준다. 스코트는 100세 생일을 앞두고 더 이상 육체가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힘에 부침을 깨닫고 스스로 음식을 끊음으로써 핼랜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 한 줄은 나의 눈을 자극하고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많이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같은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 라는 편집자의 멘트에 동감을 하며 밑줄을 그었다. 즉시 그 책을 구입하여 읽었다. 책 속의 주인공 스코트는 미국 명문대 교수였으나 지성인으로서 시대에 타협하지 않고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념과 신념을 추구했었고 사회의 정의를 위하여 가난과 불편함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드린 독한 사람 이었다. 역시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확실한 정의를 내렸었고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임종 후 시신처리 방법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명시해 두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수정 확인 하기도 하였다. 그는 100세에 체력의 한계를 느껴 오래 전부터 준비한 죽음을 당당히 대면하였다고 부인인 헬랜은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변의 관습을 보고 배우며 경험을 거듭하면서 생활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대부분 생명의 연장에 매달리다 하는 수 없이 항복하는 양 죽음을 피동적으로 받아 드리는데 법정 스님은 스코트의 죽음을 어떤 선사의 죽음보다도 깨끗하고 담백하며 산뜻하다고 표현하였다.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저녁 잠을 청하듯이 일생을 열심히 살고 죽음을 청한 스코트는, 현대 우리 주위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삶과 죽음에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 같았다. 책을 읽으며 그는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라고 저도 모르게 가슴에 새겨졌다. 평범하지 않는 삶을 영위하다 능동적으로 죽음을 포옹한 지성인이 소개됨은 삶의 위엄을 지키려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생각 할 범위를 넓혀 줄 것 같다.

요사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누리는 복이 여럿 있다. 부부싸움 줄어진 것이 하나이지만 인생의 유한성을 매일 되새기며 하루 하루가 귀한 줄 알고 알차게 살고 싶은 욕심도 그 중의 하나다. 무엇보다도 죽음을 추상이 아닌 실상의 생활로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자연스레 이야기 할 수 있음이 큰 복이라고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