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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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흡연과 나

2017.12.27 20:16

라만섭 조회 수:6

흡연과

내가 담배를 처음으로 접하게 계기는 일찌감치 초등 학교 (5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루는 조숙 망나니 선배가 다가와서 자기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나에게 건네며 한번 피워 보라고 내미는 것을, 호기심으로 받아 모금 빨아 당겼다가 되게 혼난 적이 있다. 기침과 어지러움으로 한동안 심한 고통을 겪었다. 어른 흉내를 한번 보려다 기겁을 하고 말았다. 후로 나는 망나니 불량배 친구를 멀리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얼마 있다가 소년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중학교 6학년에 재학 6.25 사변을 맞아 군에 입대 하기 직전, 나는 한시적으로 미군 헌병대(777 MP Battalion)에서 근무 한적이 있었다. 당시 미군 병사에게 지급되는 야전 급식인 레이숀(Ration Box)에는 병사들이 하루에 먹을 여러 가지 먹을 거리가 많이 포함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고급 양담배도 갑씩 들어 있었다. Lucky Strike, Chester Field, Camel, Philip Morris 당시 유행하던 낯익은 상표 들이다. 나는 담배를 포함한 하루 배급 량을 의무적으로 남김 없이 소비 하였다. 연신 푸푸 거리며 하루에 담배 갑을 연기 속으로 날려 보내곤 하였다.  맛도 모른 그냥 연기만 뿜어 댔다. 그러면서 양담배는 서서히 나의 감각을 마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까지만 해도 아직 나는 꼴초의 경지에는 다다르지 않았던 같다. 소위로 임관한 직후 겨우 하이틴의 굴레를 벗어 난지 얼마 되는 풋내기 초급 장교인 나로서는 대부분 나보다 연상인 동급자들과 어울려 행세하기 위하여서도 담배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제대 후에는 돈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철이 들어서 인지 한동안 금연으로 지내다가, 대학 졸업 후(1959년) 취직을 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흡연 문화인(?)행세를 하기 시작 하였다.

시절 한국 사회의 흡연 문화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철저히 담배 친화적이어서 어디를 가나 웬만한 성인 남자는 사교에 필수적인 도구로 담배를 지니고 다녔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담배부터 서로 권하는 것이 예절이었다. 담배가 일상 생활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던 시절이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으레 담배와 재떨이가 상비품으로 준비 되어 있었다. 여자와 데이트 때에도 흡연은 신사다움을 돋우어 주는 수단이 되었다. 키스 때에는 냄새가 났음 한데, 그래도 결혼에 꼴인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뒤돌아 당시의 한국사화는 그야말로 흡연자의 천국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찾는 것이 담배요,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담배이었다. 하루 평균 정도를 피웠던 같다. 거의 하루 종일 연속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다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담배를 피우다가 담뱃불이 이불에 옮아 붙어 집을 태워 버릴 하기도 하고, 옷마다 구멍이 뚫리지 않은 옷이 없을 정도로 한때 담배에 중독 되어 있었다.

1969 씨드니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곳 에서는 한국의 담배 문화가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런 호주를 재미 없는 시골 풍의 사회로 폄하 하기도 하였다. 직장 내의 영국 친구는 담배의 해독을 나에게 일러 주면서 은근히 금연 하도록 설득 하곤 하였다. 어느 나의 책상 옆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에, 미처 끼가 꺼지지 않은 담배를 버리고 퇴근 했다가 쓰레기통에 불이 붙어 사무실에서 온통 난리 법석을 피우고, 이튿날 평소 점잖던 사장에게서 경고성 인사를 받은 적도 있다. 후로 나는 화재 위험도 덜하고 맛도 훨씬 나은 편인 파이프 담배로 업그레이드 하였다. 지금도 당시 내가 애용 하던 덴마크 보겐 리프’ 은은한 향을 잊을 없다. 내가 파이프를 물고 있으면 향기가 사무실 안에 퍼져 나가 업무 능률이 오른다면서 동료 직원들로부터 칭찬(?)(Complimentary Comment) 받기가 일수였다. 나의 30 흡연 역사를 통틀어 시절이 나의 흡연 전성기였다고 생각 된다.

미국에 와서는 다시 Cigarette으로 복귀 하였다. 바쁜 생활에 파이프 손질할  여유가 없었던 같다. 거의 하루 종일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체인 스모커 였다. 자동차 안의 좌석은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담뱃불로 인한 구멍이 줄비 하였다. 담배 냄새는 나의 온몸과 옷에 스며들어 곳곳에 저린내를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자화자찬 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비교적 깨끗한 편에 속했나 부다. 그래도 꼴초 치고는 나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마누라의 칭찬(?) 듣곤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가운데 나의 신상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1980년1 말경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새벽2시경, 405번과 22 프리웨이가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난 자동차 충돌 사고는 나로 하여금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게 이벤트가 되었다. 자동차의 전기 접속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우측 Shoulder 정차해 있던 순간이었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만취한 뺑소니차가, 차를 뒤에서 세차게 들이받고 달아나는 바람에, 깨스 탱크가 터지면서 자동차가 전소 되는 사고 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국부를 제외한 하반신에3 화상을 입고 완전히 의식을 잃은 프리웨이상에 누어 있었다고 들었다. 다행히 지나던 다른 운전자의 도움으로 나는 인근 병원( Los Alamitos General Hospital)응급실로 실려 갔고,   꼬박 만4개월 동안 화상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날 있었다.   번의 피부 이식 수술, 어깨 골절 수술, 안면 수술 등을 거치면서 입원 환자로 4개월, 외래 환자로 2개월을 용케도 견뎌 냈다. 아무튼 일은 자동적인 단연(斷煙) 계기가 됨으로써 나의 30 흡연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퇴원 후에 한두 옛날 생각이 나서 담배를 입에 대어 보았으나, 이미 니코틴에서 해독된 나의 몸은 담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담배 냄새가 역겨워 담배 피우는 사람 곁을 피해 다니게 되었다.


나도 변했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나는 혐연가(嫌煙家,Tobaccophobe))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흡연 생활 30년, 금연 생활 30년의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그때 단연을 결행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2014년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