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의 문학서재






오늘:
13
어제:
24
전체:
46,817

이달의 작가

민족분단의 비극과 교훈 (수필)

2018.03.07 05:25

양상훈 조회 수:25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 민족은 해방이 되었다.

우리의 의도와는 달리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전후 처리하는 과정에 세력 경쟁의 희생물로 우리국토가 양분이 되어버린 참담한 역사를 긋고 말았다.

부모형제가 남북으로 헤어져 살면서 결국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서로 겨누는 동족상쟁의 참극을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소련의 묵인아래 1950625일 일요일 새벽4시 북한공산당은 소련제 탱크350여대와 수백문의 야포로 중무장한 기갑부대를 선두로 일제히 38선을 기습돌파하여 자유강토를 붉은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물밀 듯 밀려 닥친 탱크대열에 기습당한 우리군은 M1총을 쏴대고,수류탄을 퍼 부었다.일부 용맹한 병사들은 군 트럭을 몰고 탱크정면으로 덮쳐 육탄으로 반격도 했다.

 

그러나 병력의 숫자로나 화력 면에서도 중과부적(衆寡不敵) 이었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선두부대가 불길처럼 춘천, 가평, 원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서울을 향해 피난민대열을 앞질러 땅거미처럼 밀어 붙여, 3일 만에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탱크대열이 짖 밟고 있었다.

서울 시내가 시가전으로 불바다가 되어 공산군들로부터 함락되면서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시민들은 공산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고 수많은 애국인사들이 북으로 납치되어 갔다.

마지막 피난열차에 미처 타지 못한 가족들이 울부짖는 아비규환 (阿鼻叫喚) 의 참상,

소달구지에 미어지도록 피난 보따리를 싣고, 이고 지고 걸으며 남으로 남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 대열 속에 조국의 운명은 풍전등화( 風前燈火)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에 밀린 전열을 가다듬고, 최후의 저지선을 낙동강 전선에 두고, 합동작전으로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하는 동시에,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 상륙 작전과 맞물려 적군을 포위망으로 몰아 승기를 잡기 시작, 북진을 감행하는 일대 역전의 전환점을 그었다.

전세의 판가름이 결판 날 낙동강 전투는 양측 간 진지가 몇 분 마다 바뀌는

밀물 썰물의 사투 속에 양쪽화력이 콩 복듯, 비 오듯 전투와 혈투 속에 밀고 당기며 붉은 강물로 변해버린 수많은 전상자가 속출하던 격전지 이었다.

필자의 삼촌도 이 전투에서 잃었다.그는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유복자를 남긴채 조국의 방패가 되어 조용히 찬 이슬로 사라졌다.

전사통지를 받고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던 그 당시, 어린 가슴에 상처로 남아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전쟁 3년 동안 유가족이나 피해가 없었던 가정이 얼마 있었을까!


그해 915일 맥아더 유엔사령관이 감행한 인천 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잊을 수 없는 쾌거 이었다.

일본 맥아더 사령부에서 출동하여 인천에 상륙한 선봉 해병대는 암흑 같은 캄캄한 월미도에 착륙하여 초긴장한 가운데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조수 간만의 시차를 십분 이용하여 후방에 해상 함포사격의 비호를 받으며, 적의 핵심지역인 인천중심가를 융단폭격과 함께 특공대가 기습적으로 순식간에 제압하여 신화같이 끝내버린 성공적인 작전 이었다.

인천을 완전 점령한 아군들은 928일 경인가도로 당당하게 패잔병들을 쓸어가며

빼앗겼던 서울을 3개월 만에 탈환하면서 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서로 얼싸안고 감격

속에 중앙청에 승리의 태극기를 꽂았다.

드디어 그해 10월초 38선을 돌파한 아군들은 북으로 전진하기 시작,1020일에 평양을 수복하고 1주일 만에 주력부대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압록강 강물을 철모에 퍼 담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치는 감격 속에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백두산 영봉에 우리 국군이 통일의 태극기를 꽂으려는 감격의 순간, 혹한에 폭설이 휘몰아치는 한만 국경선에 백 수십만의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구름떼처럼 한반도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낮에는 숨을 죽이고 깊은 밤 야음을 틈타 피리와 나팔소리를 슬프게 불어대며 심리전과 인해전술로 두더지처럼 덮쳐오는데 포화를 계속 퍼부어도 꼬리와 꼬리를 자르고 잘라도 꿈틀거리는 공용처럼 덤벼오는 공산군들..

올해 크리스마스는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낼 것 이라는 사기충천의 흥분은 잠시 얼어붙은 눈보라 속에 아군들은 가슴을 치며 분통 속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흥남부두 철수작전은 동족상쟁이 남긴 또 하나의 생이별로 민족비극의 대 이동이었다. 일부가족을 남긴 채 울부짖으며 떠나는 피난선!

곧 통일이 되어 서로 만나리라고 믿었던 이산가족이 66년 동안 지금까지 헤어져 살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을까!

그해 이듬해 14일 중공군 대거 침략으로 서울을 다시 비우게 되었다.

3월말에 재탈환하여 38선을 회복하면서 의미심장한 각오로 유엔사령관은 중국본토를 융단 폭격하여 전쟁을 승리로 끝낼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은 세계대전의 확산우려와 국내문제와 관련, 전쟁 영웅에 대한 염려인지 맥아더를 4월 중순 전격 해임시키고 본국으로 소환 해버렸다. 그는 귀국하여 국회청문회에서 수많은 질문공세를 받았으나 단호하게 짧은 명언을 날렸다.

노병은 잠시 사라질 뿐 영원히 죽지 않는 다는 의미 각오한 일갈로

주위를 숙연하게 하여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회자하고 있다.

전세가 불리한 틈을 노려 소련의 제의로 휴전이 협상되는 3개월 동안 38선 주변에서 서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유리하게 점령하기위한 빼앗고 빼앗기는


혈전이 산천초목을 붉게 만들었다.

당시 휴전 막바지에 해발 395미터의 백마고지(철원)15일간 전투는 275천발의 포탄이 떨어지고, 아군 3,423명 적군14,389명의 전사자를 속출했던 기록만 봐도 휴전회담 교착상태에서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전쟁 3년 만에 온 동포의 휴전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토록 갈망하는 우리의 통일 염원을 외면 한 체 1957727일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붉은 전선에 총성은 일 단 멎고 말았다.

아무런 소득 없는 전쟁의 종말은 너무도 허망했다. 전쟁기간 3년 동안 수백만의 사상자 수십만의 전쟁고아, 미망인, 수천 명의 애국인사 납치에 조국강토는 피바다와 폐허로 변하고 산업시설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3천만 동포는 전쟁공포의 후유증과 굶주림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전쟁의 비극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 참상을 안다. 굶어본 사람만이 배고픔의 괴로움을 안다.

앞으로 더 이상의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 6.25 같은 전쟁이 다시일어 난다면 승패를 가름하기 전에 우리민족은 영원한 종말을 맞이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북한정권은 하루 빨리 핵을 포기하고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으로 민족번영을 도모하면서 세계평화의 대열에 함께 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

(: 맥아더후임 밴프리트 장군은 국군9사단과 종공군 3개사단 간에 24번 빼앗고 빼앗긴

화력을 넘어 정신력의 승리라고 가장높이 평가. 그는 공산남침을 막은 영웅으로 한국을 제2조국으로

헌신,육사건립.국군20개 사단증설. 한국군장교 미국유학 추진, 전쟁 때 외아들 26폭격기로

해주에서 전투중 전사. 이대통령은 대한건국훈장,태극무공훈장수여.전후 한국에서 헌신하다가 72.9.23 100세로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