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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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우물안 개구리

2018.03.26 12:37

라만섭 조회 수:3

우물안의 개구리(1)

우리는 이세상의 주인이 당연히 바로 우리네 인간 이라고 생각 하며 산다. 어떤 사람 들은 평생을 자기가 우주의 중심에 자리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나()라는 우물에 갇혀서 산다. 우물안의 개구리와 다름 없다.

그러나 바깥 세상에 관심이 있는 용기 있는 개구리도 있다. 그에게는 언젠가 우물 밖으로 나와서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행운의 날이 찾아 올수도 있다. 21세기를 사는 지성인으로서, 진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를 가져 보는 자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틀린 말이 될 까.

우주 안에는 천억(one hundred billion)이 넘는 은하(Galaxy)가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도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가 존재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나의 은하수 안에는 최소 천억이 넘는 태양과 같은 별(Star)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별 주위에는 이를 선회하는 여러개의 유성(행성, Planet)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은하가 차지하는 공간은 전체 우주의 고작 일억분지일(一億分之一)에 불과 하고 나머지는 텅 빈 진공 상태 라는 것이다.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북두칠성(Big Dipper)안에 만도, 약 백만개가 넘는 은하가 존재 한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거짓말 같은 과학적 사실이다. 아무튼 우주의 크기를 필설로써 표현 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듯 하다.

다세포 동물인 인간의 몸 안에는 약 60조에 달하는 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세포 하나 하나 에는 60조에 이르는 또 다른 세포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움직일 때 마다 헤아릴수 없는 수의 세포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된다. 요즈음의 과학은 동물을 복제 할때에도 그 수많은 세포 가운데 하나를 골라 이용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많은 세포가 그물망처럼 얽힌 상태에서 일사불란 하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해 가다가도, 그가운데 어떤 하나 라도 룰을 어기고 변칙적인 번식을 하게 되면, 메카니즘에 이상이 생겨 우리의 몸은 그만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주위 에서 흔히 보는 암도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같은 현상은 세포() 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적용 된다고 한다. 일심이 무량심(一心 無量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쓸 수 있는 마음이 이렇듯 무궁무진 하다 보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마음을 골라 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주 생태게의 진화 과정이라는 큰 맥락에서볼 때, 개별적인 존재는 그리 중요 한게 못된다. 40억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지구의 생태계에서, 고작 몇 십 년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에 무슨 의미를 부여 할수 있겠는가. 역설적으로 말해, 지구의 자전설이나 공전설을 예로 들 때, 반드시 갈리레오나 코페루니크스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기업의 흥망성쇠도 유사한 관점에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체 보다는 생태계 전체의 환경 조건이라 하겠다. 이렇게 개체의 가치를 폄하하다 보면, 개인의 입장에서 허무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대우주 안에서의 작은 개체의 존재 가치가 비록 미미하다 하드라도 인간은,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의 힘을 빌어 구원을 얻고 사후에는 천당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희망 안에서 존재 의미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지식이 늘어 날수록 더욱 객관적으로 사실을 관찰 하게 되고, 그럴수록 허무감은 더욱 증폭 되어 가는 것 또한 사실로 인정할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시점에서 종교냐 비종교냐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어느편을 택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심리상태에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편을 택하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과학이 보여 주는 증거가 너무나 확실해, 종교에 기대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안겨 줄수 있는 길은, 오히려 자연 속에서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보다 확실 하게 안정을 얻는 데에 있는 것이다. 확실한 보장도 없이 영원과 무한을 약속하는 신비(Mystique)에 의지하고, 그 에 대한 회의를 품는 것보다는 낫다는 믿음이다.

길지 않은 인생을 앞에 두고 확실히 보이는 것은 황혼의 고갯길 밖에 없음에도 마음은 더 없이 편안하다. 더 이상의 불확실은 없다는 현실 감각이 지배하여 잔잔한 안정감을 준다. 자연의 법칙을 믿는 마음에서 오는 자기 최면이 이루어진 탓일 까.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도, 우물 밖의 세상은 항상 열려 있다.

 

 

2014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