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프리웨이를 달리다

2018.04.10 09:52

서경 조회 수:558

  비온 뒤의 개인 날씨는 너무도 청명하다. 구름도 보송보송 목화솜이다. 아무리 파블로 네루다가 좋아도 뜻뜻한 돌침대에 누워 책장만 넘기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날씨다.
  생전 처음으로 동행없이 혼자 차에 올랐다. 고전적(?) 가요가 들어있는 <향기 있는 음악> CD를 넣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다 나온다.
  만남, 남남, 열애, 모두가 사랑이에요, 그날, 촛불, 빗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이어 보고 싶은 얼굴,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석별, 모닥불... 줄줄이 이어진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5번 남쪽 프리웨이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발에 힘이 들어가니, 75마일, 80마일을 오락가락한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87마일까지 올랐다. 이크, 조심해야지.
  얼마 전, 자정이 가까워 오던 밤. 아무도 없는 길을 전세라도 낸 듯, CD 노래에 취해 목청 높여 따라 부르고 오다 스피드 티켓을 받고 말았다. 경찰이 따라오는 걸 백미러로 본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차를 세운 경찰은 "매엠~ 유 가러 럭키!" 하며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하더니 계속 85마일로 내가 달렸다고 일러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젊은 경찰들이다. 어차피, 티켓은 먹는 것, 배포가 유해진다. 보험 증서와 드라이브 라이센스를 건네며 한 마디 던졌다.
  - 난, 별로 빨리 달린 느낌이 없는데?
  - 그러면, 넌 정말 더 큰일이지!
  듣고 보니 그렇다. 매일 들며나며 와인을 홀짝거리는 남편도 도대체 본인한테는 기별이 안 온다고 했다. 내가 보면, 맨날 몽롱하게 취해 있는 모습인데도. 이거 낭패다 싶어 남편에게 했던 그 말을 지금 젊은 경찰이 내게 해 주고 있다. 순간,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장난기 있게 물었다.
  - 그 구간 몇 마일로 가야 하는데?
  그런 내가 저들도 우스운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55마일 구간이란다.
  - 참, 내! 넌, 거길 55마일로 가는 사람 봤니? 그렇게 가다간 오히려 슬로우 티켓 먹겠다!
  그래서 자기도 75마일까지는 봐 준단다. 그러면 그렇지. 한 때는, 프리웨이에서 기면서 간다고 성질 급한 놈들은 제 앞에 가는 사람을 쏴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경찰은  내가 85마일로 갔지만 특별히 티켓에는 80마일로 썼다며 생색까지 낸다. 5마일 차이에 벌금이 크게 다를 수 있다나.
  - 고맙수.
  시민들 돈 뜯어 먹을려고 눈이 벌건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어쩌겠나. 방긋, 미소까지 날린 뒤 조심조심 차를 돌렸다. 긴장한 탓에 차 잘못 돌리고 가다, 다시 이중 티켓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잘못이 크긴 크다. 앞으로도 방심은 금물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사고는 일어난다.
  차 속도가 느려지자, 기분도 다운되고 목청마저 닫혔다. '무빙 티켓이라, 벌금이 세겠지? 얼말까?' 낭만은 멀리 가고 현실적 문제가 슬슬 발동을 건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꽃길 밟고 오듯 조심조심 기어 왔다. 한 달 뒤에 날아온 벌금은 거금 $490. 세상에, 이 불경기에 $490이나 뜯기다니. 배가 아파, 정로환 다섯 알을 먹고 잤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요일. 기분 내는 것까진 좋지만, 또다시 정로환을 먹고 잘 수는 없는 일.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의 힘을 슬며시 뺀다.
  코발트 블루 하늘 아래, 듬성듬성 뜯어놓은 목화솜 흰구름이 미동도 없이 떠 있다. 도대체 구름은 몇 그램이나 되는 걸까. 그 평수 넓은 몸매에 저토록 가벼운 몸무게를 지닐 수 있다니, 그 비결은 뭘까.
  팜트리 사이로 관능미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능선과 올드 미션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런 집들이 언듯언듯 보인다. 그림 엽서같은 풍경이라 사진을 찍고 싶지만, 달리는 차 속에서 운전하며 찍기는 위험 천만한 일. 포인트 비유 까지는 참아야 한다.
  속도가 오른다 싶으면 살살 달래가며 한참을 달렸더니, 오른쪽으로 은빛 물결 반짝이는 바다가 보인다. 와아, 바다다! 어린애처럼 탄성을 지르며 포인트 비유를 향해 프리웨이에서 내렸다.
  세상에! 이건 또 웬 횡재람! 수 십 마리의 바다 갈매기가 순백의 날개를 접고 무리 지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망망한 바다를 응시하며 두 눈 촛점을 모은 채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이 애틋한 망부석 같다.
  그러다, 기다림에 지쳐 가슴에 불이라도 붙었는지 푸른 창공을 향해 푸드득 날아 오른다. 창공을 휙 한바퀴 돌고 와야 속이 풀릴 태세다. 바로 눈 앞에서 큰 날개를 펼쳐 들곤 창공을 선회하는 갈매기떼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굉음 하나 내지 않고 잘도 나른다.
  문득,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벡 말이 떠오른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 치고, 사람은 달린다'. 그렇지, 너희들은 새라서 저토록 높이 나르는구나 싶었다. 저들은 높이 나르는 새가 멀리 간다는 말을 알고나 있을까. 아니면, 골치 아픈 철학은 너네 몫이지 우리 철학은 아냐 하고 초연한 것일까. 앉고 싶을 땐 앉고, 나르고 싶을 땐 나르는 단순 철학을 가끔은 배워도 좋겠다.
  뽐내듯 선회하는 갈매기떼 뒤로 흰 파도가 해안선을 따라 띠를 두르고 있다. 해안선을 볼 때마다, 중학교 때 백곰이란 별명을 가졌던 국어 선생이 떠오른다. 시인이기도 한 선생은 어린 우리를 앉혀 놓고 이렇게 묻곤 했다.
  -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와 모래펄에 몸을 푸는 저 파도의 곡선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난 그 시어를 찾을 수 없어. 너희들도 한 번 생각해 봐!
  그 이후로 나는 거기 걸맞는 시어를 찾기 위해 고개를 한 시로 꼬았다가 열 한 시로 꼬았다가 하며 학교를 오가곤 했다. 결국, 찾아낸 건 '파도 자락'. 엄마의 한복 치마 끝자락 곡선을 보며 생각해 낸 말이다. 엄마가 사푼사푼 걸으실 때마다 사각대는 소리와 함께 겹쳤다 펼쳤다 하는 치마 자락의 부드러운 곡선이 꼭 파도 자락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끝내 그 말을 입에 내어 발표하진 않았다. 엉뚱하다는 반응과 함께 다들 웃음보를 터뜨릴 것만 같았다. 백곰의 아름다운 질문이 떠올라 오늘도 내 시선은 하얀 파도 자락에 오래도록 머문다.
  아름다운 곡선이다. 능선이며, 해안선이며, 하다 못해 산 마루로 넘어가는 고갯길까지 자연은 다 아름다운 곡선이다. 곡선은 천천히 돌아서 가는 길. 때로는, 숨을 고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길과도 닮았다.
  아무려나.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인정샷 한 장 없이 지나친다면 어찌 정감어린 여인이라 하랴. 아니, 어찌 시심 어린 시인이라 부르리. 갈매기도 찍고, 갈매기와 벗하고 노는 아기 다람쥐도 찍고, 나도 슬쩍 풍경 속 한 점으로 섰다. 그래. 인생이 별 건가. 우린 저마다의 모습으로 제 구도를 그리며 풍경화 한 폭을 그리는 거다.
  눈부시도록 청명하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날. 외로움은 아마도 덤으로 얻은 보너스겠지. 정서 맞는 친구와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드라이브하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5번 남쪽 프리웨이. 거긴, '남으로 난 창'으로 긴 길이 뻗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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