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오늘:
10
어제:
0
전체:
5,454

이달의 작가

인간이라는 이름의 욕망체

2018.04.10 11:33

라만섭 조회 수:12

인간이라는 이름의 욕망체

 

모든 죄의 씨앗은 욕망이라고 불교철학은 강조한다.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 파멸에 이르게 되며,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을 끊어버려야만 깨달음으로의 길에 들어선다고 말한다. 탐욕은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제거되어야 하는 독소적 요인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욕망을 푸줏간 앞의 개에 빗대어 표현했다. 주인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한 마리의 개가 실감 있게 그려진다. 푸줏간 앞에서 서성거리는 개가 바로 욕망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욕망은 본능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식용이나 수면욕 같은 욕망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라 억제할 대상이 아니다.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은 성욕이라고 한다. 한 영문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욕망을 뜻하는 영어의 Desire 라는 단어 만해도, 본래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강한 성적욕망이라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식욕을 느끼지 못한다면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듯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도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건강한 남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적 욕망은 본능적이긴 하지만, 적절히 절제할 필요가 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사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욕망의 자제능력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욕망의 원천 봉쇄가 가능한 것인지에 관하여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고도로 농축된 각고의 수련 없이는 본능적 욕망의 억제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수도승이나 가톨릭 수도사들의 금욕 생활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들이 쉬지 않고 예불(예배)하고 경을 암송하고 참선(기도)하는 목적은 바로 욕망의 통제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본적이 있는 가상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태평양 한가운데 섬이 두개 있는데, 작은 섬에는 야만인과 문명인이 큰 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큰 섬의 한 소녀가 작은 섬의 문명인을 사랑한다. 하루는 소녀가 애인을 만나러 큰 섬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룻배를 이용하기 위해 사공에게 값을 물었다. 돈은 필요 없는 대신 발가벗은 채로 배를 타라는 조건이었다. 크게 놀란 소녀는 고민 끝에 마을의 현인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너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현인의 대답을 듣고 사공의 제의를 받아드리기로 결심하였다. 작은 섬에 도달하자 전라의 소녀를 본 야만인이 소녀를 강간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명인은 소녀와 헤어지기로 하였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데, 여기서 5(야만인, 문명인, 소녀, 현인, 뱃사공)의 등장인물을 선악(善惡) 기준에 따라 순위를 매겨 보라는 주문이었다.

한 방문객이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에게 수행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손가락으로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바로 이것 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물었더니, ‘나는 달라이 라마 이다를 속으로 수없이 되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그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인간에게 있어, 욕망은 인간 그 자체에 불과 하다. 그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욕망체일 뿐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욕망을 다스려서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다면, 거기에 새로운 가치 실현을 위한 동력이 마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욕망이라는 강렬한 에너지를 적절히 조절 하면서, 보다 가치 있는 삶을 꾸려가는 지혜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20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