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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권위의 상실

2018.08.26 04:55

라만섭 조회 수:20

권위의 실추

 

권위라는 말은 권력과 복종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해방 전 일제 강점기의 강압 통치와 해방 후 비민주적인 권위주의 체재에서 나의 청소년 시절을 보낸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는 달리, 일반 대중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권위적 인물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음을 본다. 이렇듯 권위가 다 같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권위란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살펴본다. 권위는, 보통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어떤 의 개념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위자들은 다른 사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좋지만 나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안 된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소 해학적(諧謔的)인 해석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이는 분명히 이중 잣대를 지닌 위선적 자세이다. 내가 하면 되고 남이 하면 안 된다는 비열한 처신이다. 이를 두고 내로남불 이라 하던가. 존경의 철회를 불러오는 원인 행위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사회 각계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권위의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권위는 특정 인물의 덕()이나 실력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나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본다. 깡마른 그의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권위는 10억 인도 국민의 정신적 보루가 되었으며, 식민 통치에 대한 그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후에 넬슨 만델라와 마틴 루터킹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바 있다. 종교 지도자에서 보는 것처럼,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권위가 신성시되는 경우도 있다. 로마 교황의 지위가 주는 권위가 이를 대변한다. 입헌 군주제를 취하는 나라의 현존하는 국왕들도 비슷한 범주에 있다고 하겠다. 지난날 절대 권력의 상징이던 선조들에 대한 향수(?)를 달랠 길은 없지만, 명목상의 자리라도 지키게끔 허락 해주는 국민 대중의 아량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역사와 전통을 귀히 여기는 대중의 문화사랑 마음을 이해할수록, 그들이 바라는 권위의 품격을 잃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는 강압에 의한 절대 권위를 향유하는 독재자도 존재한다.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강요되는 강압적 권위이다. 불복하면 가차 없는 처벌이 있을 뿐이다. 가장 좋은 예를 휴전선 이북에 두고 있는 역사적 불행을, 우리 조선 민족은 안고 산다.

 

부동의 권위는 역사속의 성현들( 예수, 부처, 마호메드등)에게서 본다. 수천 년 전의 그들의 가르침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영혼을 사로잡는 신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심은 절대적이다. 그들의 권위는 가히 신성불가침이다. 이는 그들이, 비록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를 시도한 몇 안 되는 존귀한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인가 보다.

 

전통적인 가부장제도하에서의 아버지상의 권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신임을 잃으면 존경을 잃는다. 권위는 존경과 신임의 바탕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위선과 권위는 양립 할 수 없다. 위선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설 자리가 없다. 권위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은 정직이다. 거짓 없는 올바른 마음은 신망을 얻는다. 옛날에 듣던 유교적인 스승의 권위는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스승의 권위는, 그들이 학생에게 얻어맞는 학교 마당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스승이나 대통령도 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어떤 칼럼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실추한 권위를 만회하기에는 너무 나갔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기성세대의 위선됨에도 책임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권위의 완전 상실이다.

 

권력은 한낱 부질없는 것이며, 신망 잃은 권위는 이내 실추하고 만다. 그 어떠한 권위도 대중의 신임과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존경심 없이는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이는 역사가 주는 교훈이며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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