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꿈에 본 희숙이

2018.09.22 23:14

서경 조회 수:9

꿈에 본 희숙이.jpg



 
  꿈 속에서 초등학교 벗 희숙이를 보았다. 고상한 품위를 지닌 육십 대 초반의 여인 모습이다. 그녀는 오고, 나는 지나가며 스쳐갈 뻔한 지척의 거리였다. 길을 비켜주려 하다, 얼핏 비친 희숙이의 어린 모습이 내 발길을 멈추게 했다. 
  - 혹시, 박은숙씨 아니십니까?
   왜 뜬금없이 그의 언니 이름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는 분명 내 초등 친구 희숙이 얼굴을 떠올렸는데도. 세월은 흐려진 눈썹처럼 기억마저 희미하게 했나 보다.  
  - 아닌...데요... 아니, 희선이? 나, 희숙이!
  부정하고 지나가려던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화들짝 놀란다. 반가움에 그 큰 눈이 고양이 눈처럼 휘둥그레졌다. 
  - 아, 맞다! 은숙이는 네 언니 이름이지!
  - 야, 이거 얼마만이냐?
  우리는 품위 유지도 잊은 채, 어린 아이처럼 두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그참에, 아까운 꿈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채 2, 3분이 걸리지 않은 만남이었다.
  꿈에서 깬 나는 그리움에 가슴이 아려 왔다. 짧아서 더욱 아쉬웠다. “희숙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녀의 이름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차고 올라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일상에서는 거의 잊고 살아온 그녀가 꿈 속에 나타나자 쟁여 두었던 어린 날 그리움이 사연 안고 앞다투어 나온다. 교회 친구 희숙이는 내게 친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희숙'이란 이름은 내 '주일 학교'와 동급 의미를 지닌 동의이어다. 또한, 그녀 이름은 늘 또 다른 그리운 이름들을 함께 달고 나온다. 젊고 유능했던 그의 아버지 박목사님, 내 신앙의 밀알이신 이흥연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 그리고 얼굴이 하얗고 노래를 잘 불러 나를 설레게 했던 철이... 
  동시대를 함께 한 추억들이 또 다른 추억들을 불러와 꼬리연처럼 나를 두둥실 띄운다. 연이어, 내 마음은 빛살처럼 고향 마산으로 날아 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쯤이었나 보다. 훗날, 내 꿈의 산실이 된 신마산 교회에서 희숙이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새로 부임한 목사님 딸이었다. 눈썹이 짙고 눈이 커, 이국적인 모습을 한 그녀는 목소리도 좋아 노래를 잘 했다. 단연, 존재감 없는 나에 비해 인기 1위였다. 
  사랑 받는 사람은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님이신 박목사님도 교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다. 박목사님은 젊고 유능한 분으로 침체되어 있던 교회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 우리 주일 학교 아이들은 그의 사랑을 생명수처럼 마시며 자라는 생명 나무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남자 목사님이신데도 가무(?)에 뛰어 나, 노래와 무용을 직접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그에게 배운 솜씨로 철도 병원이며 요양소에 크리스마스 위문 공연을 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곤 했다. 코도 베어갈 듯한 삭풍을 맞으며 새벽송을 돌고 온 뒤 먹은 떡국은 일생에 잊지 못할 별미요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 
  우리 교회가 유명한 꽃동산 교회가 된 것도 오로지 박목사님 업적이다. 교회 빈 공터를 열 두 제자 이름을 붙여 각 학년 별 주일 학교 꽃밭으로 분양해주셨다.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꽃동산 성전에 꽃 가꾸는 동심이라니!
   가장 예쁜 꽃밭을 만들기 위해 우린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꽃밭으로 달려 나갔다. 반사 선생님과 함께 꽃씨를 뿌리고 알뿌리를 심던 기억은 보석같이 아름답다. 그때 함께 꽃밭을 가꾸었던 이흥연 선생님은 색색의 꽃밭을 보며 종종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 너희들이 이처럼 꽃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기 위해 애 쓰듯, 주님께서도 너희들을 꽃처럼 예뻐하시고 늘 사랑으로 가꾸어 주신단다.
  또 우리를 둘러 보며 이런 말씀도 하셨다. 
   - 너희들은 하나 하나 주님의 아름다운 꽃송이요, 너희들이 송이송이 모이면 주님의 아름다운 꽃동산이 되는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교회 안 나오는 친구들도 데려와 예쁜 꽃동산 친구로 만들어 주지 않으련?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꽃밭에서 동화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우리는 별천지에 있는 듯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주요 왕자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로 회억하는 것도 행복한 주일 학교 시절 덕분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 반 반사 선생님이셨던 이흥연 선생님도 열 일곱 살에 지나지 않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는 완고한 불교 신자 아버지로부터 갖은 신앙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에게 그토록 아름다운 신앙의 씨앗을 키워주신 밀알이셨다. 
  어느 수요일 오후 다섯 시, 어린이 예배가 있는데도 선생님께서 오지 않으셨다. 흉흉한 소문에 의하면, 아버님이 때리고 교회 못 가도록 문까지 잠구어 버리셨다고 했다. 
  세 명의 친구와 나는 예배 후 선생님댁을 찾아 가기로 했다. 선생님이 불쌍해서 도저히 그냥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우리라도 가서 아버님께 선생님을 다시 보내 달라고 울며 매달려 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해변가를 향해 내려 가면, 일본식 집인 적산가옥이 나란히 있는 곳에 선생님 집도 있었다. 어둠은 서서히 몰려오는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선생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도 기척이 없다. 우리는 엉엉 울면서 선생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 아버님이 나오셔서 가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때다 싶어, 우리 네 명은 아버님 옷자락을 잡고 울면서 애걸복걸 했다.
  - 선생님 보내 주세요! 우리 선생님 제발 보내 주세요!!
  그 분도 분기탱천하셨지만, 우리도 떨어질 줄 몰랐다. 밤공기를 가르며 울부짖는 우리의 울음 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달도 안타까워 자꾸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웃 보기가 창피했을까. 아니면, 우리의 울음 소리가 아기 잃은 이스라엘 여인의 울음보다 더 애절하고 처량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를 갸륵하게 보시고 역사하신 것일까. 우리가 이겼다! 
  그 분이 화난 채 휙 들어 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벌겋게 닳아 오른 선생님이 나오셨다. 그야말로, 서러움에 북받쳐 선생님과 우리 네 명은 얼싸안고 울었다. 그 날 이후, 선생님은 예배 시간에 빠진 적이 없었다. 나도 일요, 수요 어린이 예배를 단 한번도 빼 먹은 적이 없다. 
  아, 그러나 내 행복은 오로지 일 년, 그 뿐이었다. 5학년 때 나는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유독 고향 마산을 그리워 하고 남다른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도 ‘못다 핀 꽃 한 송이’ 같은 내 사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십 여 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난 너무나 뜻밖에도 이흥연 선생님이 서울 성심여대 음대 교수로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반가웠다. 바로 국제 전화를 넣었다. 그는 꼬맹이었던 날 기억 못할 테지만, 난 꼭 들려드릴 말이 있었고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은 애틋한 추억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 여기 미국인데요... 이흥연 교수님 계십니까?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쪽 교환양 목소리는 정중하지만 착 갈아 앉아 있었다. 
  - ...... 언제 교수님과 통화하셨습니까?
  - 한번도 없었습니다. 오십 여 년 전 제 주일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 아, 네......
   교환양의 말없음표가 불길할 정도로 길어진다.
  - 이제 그 학교에 안 계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 네...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네엣?
   심장 무너지는 소리에 전화기가 제 먼저 떨어졌다.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비보였다. 밤새 흐느껴 울었다. 어린 날 울었던 그 분량만큼 눈물을 뺀 것같다. 이불을 끌어 안고 하염없이 우는 내 모습을 보며 천상에 계신 선생님 심정은 어떠했을까. 
  - 선생님! 신앙의 씨앗을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이 한 마디, 심장의 피를 찍어 붉은 연서 띄운다.
  꿈에 본 희숙이. 뜬 눈으로 보고 싶다. 주일학교 같은 반으로 이 모든 아름다움을 공유한 친구 희숙이는 지금 어느 지구 귀퉁이에 사는 걸까. 부디, 남은 날도 주님 안에서 행복했으면 싶다. 
  - 보고 싶다, 친구야!  연락 좀 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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