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섭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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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입 벌리고 자는 노인

2019.08.08 04:51

라만섭 조회 수:37

입 벌리고 자는 노인

 

어릴 때의 기억으로, 어른들이 편지에서 즐겨 쓰던,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운운 하던 구절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는, 세월의 빠름을 뜻하는 현실적 표현으로서는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에 차지 않는다. 요즈음의 세월은 그야말로 총알처럼 지나가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때는 세월이 어서 흘러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처럼 어제에 비해 오늘의 시간이 훨씬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산술적으로 볼 때,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의 길이는 같을 터인데 말이다. 마치 시공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그 무엇인가가 우리의 의식세계에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삶속의 일곱 가지의 신비(The seven misteries of life)의 저자 Guy Murchie, 이를 초월(Transcendence)의 법칙이라는 것으로 애써 설명하고 있다. 지나간 1년이라는 세월을 놓고 볼 때, 그것이 한 살배기 아이에게는 전 생애에 걸친 긴 세월이지만, 열 살짜리에게는 1/10, 백세 노인에게는 1/100의 생애에 해당한다. 과거는 작고 느리게 부각되는 한편, 현재는 크고 빠르게 인식 된다는 것이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며, 생로병사의 과정은 모든 생물에 적용되는 불가역작인 자연 법칙이다.

 

자세를 항상 곧게 유지 하며, 말할 때와 먹을 때를 제외하고, 입은 언제나 굳게 다문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줄곧 간직해오는 나의 금과옥조인 셈이다. 훗날 나이를 먹더라도 그와 같은 모습을 잃지 않을 것으로 나는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2019년 초엽?) 이 믿음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한밤중에 자다가 목이 타는 듯 한 심한 갈증으로 눈을 떠보니, 입안 전체가 마치 심한 가뭄으로 갈라진 논밭처럼 말라 있었다.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깜짝 놀랄 일이었는데, 이 같은 구강건조 현상은 그 후에도 간혈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예전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졌고, 갈라지고 째지고 쉰 목소리가 대신 자리 잡으면서 발성 자체가 힘들어졌다. 일설에 의하면 구강건조를 불러오는 원인은 오래된 식습관 특히 군것질에 있다고 한다. 팦콘이나 땅콩 또는 감자튀김 같은 마른 음식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 문제를 노화 현상의 하나로 치부하고 체념하기 이전에, 한번 손을 써보기로 하였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노화 현상의 하나로 입안의 침샘(타액선)의 기능이 저하되면 구강 건조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탈수증이 구강건조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담당 치과 의사에 의하면, 자는 동안 입으로 호흡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고 자다보면 입안이 마르게 된다는 진단이다. 입을 벌리고 잔다는 것을 나로서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 했다.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그 후로 되도록이면 마른 음식을 피하고 껌을 씹는 등 타액의 생산을 유도하도록 유념하고 있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물을 마시고 밤이 되면 치과에서 얻은 특수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고 가습기를 트는 등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춘 다음에 잠자리에 든다. (심할 때면 테이프로 입을 봉하기도 한다.)

 

낮잠을 잘 때면 저절로 입이 반쯤 벌어진다는 핀잔을 근래에 와서 나는 아내로부터 들어오던 터이다. 그래도 코를 고는 일은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아내는 덧붙인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돼 버렸다. 세월을 이기는 장수는 없다고 하지만, 씁쓸한 기분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후, 한 친지의 소개로 한약과 침술을 겸한 한방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오늘 현재(710)로 상당한 효험을 보고 있어 만족하고 있다. 3개월 쯤 지나면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아, 예전처럼 좋아하는 가곡을 열창하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그동안 씁쓸했던 기분도 이제는 많이 가셨다. 옛날(1950년대 후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서울의 여름철 오후가 되면, 반쯤 벌어진 입으로 오수를 즐기시던 선친의 모습을 그냥 무심히 보아 넘기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 선친의 모습을 답습이라도 하듯, 어느 듯 나 자신도 낮잠 잘 때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노인이 됐다. 벌어진 입안으로 벌레나 파리 같은 날것이 들어가지나 않을는지 걱정이다.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순리에 좇아, 세월과 함께 동행하기로 작정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20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