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사랑의 북트리

2019.12.26 02:08

서경 조회 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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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자가 있다. 그 곁에 또 한 남자가 있다. 존 그레이 말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다.
  어느 별나라에서 왔든, 그들의 본향은 에덴 동산이요 원조는 아담과 이브다. 그들은 너무 사랑하여, 지어선 안 되는 죄까지 함께 지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것도 함께요, 벌 받는 일도 함께였다. 서로 자기를 변호하던 부끄러움도 반반 공동소유였다. 그들은 늘 함께였고 함께 공유했다. 에덴 이후의 삶은 그들에 의해 대하 드라마로 씌여졌다.
  삶이란, 눈물과 웃음으로 엮는 씨줄 날줄 베틀짜기다. 마음은 비단인데, 나오는 결과물은 번번이 거친 삼베다. 그것은 어쩌면 험한 세상의 메타포기도 했다.
  그럼에도, ‘흐느낌과 훌쩍임과 미소’로 빚어진 인생 베틀짜기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벌칙으로 받은 잉태 보속은 외려 주님의 창조사업을 더 풍성케 하였다. 지구촌만 해도 수십 억의 인구로 별나라 집성촌인 미리내를 방불케 했다.
  김환기 화가에 의해 점점이 찍힌 별은 너와 내가 되어 물음을 던졌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한 별은 여자가 되었고 또 한 별은 남자가 되었다. 하필이면, 그 수많은 별 중에 너가 되고 내가 되어 사랑을 했다. 서로 눈부처가 되어 사랑의 서약을 하고 부부의 연도 맺었다.
  이렇듯 귀한 인연을 맺은 십 수억의 부부 중, 한 아름다운 부부를 오늘 보았다. 여자는 글을 쓰고 책을 출판했다. 그녀가 잘 하는 일은 그 일 뿐이라 했다.
  보속하는 심정이었을까. 그녀의 글에는 알게 모르게 늘 주님이 주인공 자리에 앉혀졌다. 이십 년 간 쉬임없이 달려온 그녀의 결과물은 스무 권에 가까운 책으로 엮어졌다. 한 권 한 권이 밤을 하얗게 새운 노고로 이루어진 역작들이다.
  세월의 흐름따라 책장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책들. 그러나 그렇게 대접 받아서는 안될 귀한 책들이다. 가슴에 품고 자도 모자랄 책이었다.
  한 남자가 일어섰다. 남편이란 이름의 남자였다. 먼지 쓴 책들의 표지를 털고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마침, 한 해도 저물어 성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의 머리에 반짝 불이 켜졌다. 오랜 세월 속에 빛 바래져 촉수 낮은 전등불이었는데 웬일로 그 날은 섬광처럼 번쩍불이 켜진 것이다.
  연이어 한 영상이 떠올랐다. 사랑의 촛불이었다. 첫날 신혼방에서 남실대던 바로 그 촛불. 그동안 그 촛불은 다 타서 심지에 대한 기억도 촛농의 눈물도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 믿었다.
  그는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마침, 성탄 캐롤송이 그의 잠자던 감성에 성냥을 그었다. 성탄 북트리!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성싶었다.
  그는 한 켜 한 켜 책을 쌓기 시작했다. 마치, 돌탑 쌓듯 공을 들였다. 높이가 올라갈수록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그의 손길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맨 위에 마지막 책을 올린 뒤, 볼살이 통통히 오른 산타 할아버지도 올렸다. 그래도 무언가 허전하여 꼬마 색전구로 책둘레를 장식했다.
  불을 켜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탄 북트리가 되었다. 사랑의 북트리였다. 멀리서 별들이 웃고 있었다. 아파트 창 밖 불빛들도 윙크를 보내 주었다. 무딘 남자의 마음에도 모처럼 분홍 꽃물이 들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다. 입가에 희미한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젠 서프라이즈 시킬 일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를 서프라이즈 시키는 것은 젊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잠자고 있었을 뿐, 나이 든 남자의 마음에도 낭만의 불씨는 살아 있었다.
  드디어 여자가 왔다.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가 신발을 벗고 들어 섰다. 문수 작은 여인의 발이 참 먼 길도 걸어 왔다. 남자의 마음이 잠시 울컥해진다. 그 마음 숨기려 짐짓 장난스레 “짜잔!” 소리치며 스위치를 켰다.
  색전구가 무지개 빛을 띠며 북트리를 밝혔다. 오색영롱한 불빛 아래 책들이 “나, 여기 있어요!”하고 저마다 소리쳤다. 아름다웠다. 갖가지 색으로 꾸며진 책 표지와 꼬마 전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보다 더 예쁠 수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북트리.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의 트리였다.
  여자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젖어든다. 여자의 두 팔이 절로 가슴에 포개져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여자의 입술에서 겨우 터져 나온 한 마디.
  “고마워요...”
  이 한마디 듣는 게 그리도 어려웠던가. 이 작은 감동 하나 주기가 그리도 힘들었던가. 회한의 바람이 남자의 가슴을 스쳐갔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한 순간의 감동이 여자에겐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게 여자다.
  한 해의 끝 무렵, 12월. 서편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고 선 두 사람이 언제까지 성탄을 함께 맞이할 줄 모른다. 다만, 오늘 이 순간이 마냥 행복할 뿐이다.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 또 하나 보석 상자에 채워진다.
  아름다운 추억은 삶을 살지게 하는 영양소. 추억을 지닌 사람은 어제가 아름답고 내일이 희망차다. 그게 삶의 힘이다. 내가 유독 추억을 사랑하는 연유도 그 힘이 나를 살게 하는 의미를 만들어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마다 역작을 뽑아내는 고종희 교수와 그 책으로 돌탑 쌓듯 북트리를 만들어준 부군을 떠올리며 동화 같은 수필 한 편을 써 보았다. 그 분들로 해서, 내 마음에도 색전구가 켜지는 아름다운 밤이다.
  우리 도움을 청하려, 예수님이 ‘아기 모습’으로 오시는 성탄.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에는 화성에서 온 남자 애기와 금성에서 온 여자 애기가 태어나고 있을 테지. 그들도 또 하나 뿐인 심장으로 하나 뿐인 사랑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 테지.
  이 세상 살면서 우리가 할 일은 역시 서로 정 주고 받다 가는 일. 그 하나 뿐이란 생각에 잠긴다. 하얀 밤이 지나고 어느새 여명이다. 밝아 오는 새 아침이요, 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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