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헌팅톤 비치 마라톤

2020.02.25 09:08

서경 조회 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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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일 일요일 새벽.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20200202, 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날이다.
2가 네 개나 겹치는 참 특이한 날에 다시 헌팅톤 비치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헌팅톤 비치 마라톤은 해마다 2월 첫째 주 일요일, 수퍼볼 시합이 열리는 날에 개최된다.
달리기 끝내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오후 세 시에 가족이나  친지들과 수퍼볼 경기를 시청하면 끝내 주는 하루가 된다.
해풍을 맞으며 아름다운 해변길을 끼고 달리는 이 길은 5년 전에 내 첫 하프 마라톤을 뛰었던 정겨운 코스다.
등록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시합 하루 전날에야 제임스 강 총무 연락을 받고 서둘러 참석했다.
빕넘버를 당일에 받은 것도 처음이다.
항상 연습 부족으로 불안하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등록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기에 민폐를 끼칠까 봐 더욱 마음 졸였다.
다행히 마일당 13분대로 함께 보조를 맞추어 뛰는 바람에 부담을 좀 덜었다.
11마일 쯤에 와서는 마음도 느긋해져 펀런하는 마음으로 사진도 찍고 즐기면서 뛰었다.
기록은 3시간 4분.
좀 창피하고 아쉬운 기록이지만, 제대로 연습하지 않은 걸 생각하면 이것도 언감생심이다.
내 연령대로 남녀 통합 7816명이 뛰었고 여성만 해도 4082명이 뛰었다.
이 중에 나는 56등.
내 뒤로 들어온 동년배 여성만 해도 4026명이다.
와-
기록을 보고 나 스스로도 놀랐다.
세 시간 넘게 들어오고도 이 정도라니, 나이 덕을 많이 본 셈이다.
5년 전, 첫번째 마라톤인 헌팅톤 비치 마라톤 기록은 2시간 31분.
전부 다 잘 뛰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그때는 그게 잘 뛴 건지 어떤 건지 잘 몰랐는데 그 시간이 내 능력의 한계인지 그 이후로 기록을 깨지 못했다.
딱 한 번, 내리막 코스인 아주사 마라톤에서 깼을 뿐이다.
그게 2시간 21분으로 나의 최고 하프 기록이다.
그땐 내 연령대에서 7등을 기록했다.
시간과 등수에 연연해 하지 않는 나인데도 오늘은 기분이 엄청 좋았다.
내 이름을 잘못 치면 자꾸만 ‘지휘선’으로 나오는데, 오늘 내 뒤로 따르는 자가 4026명이나 있었다니 마치 여자 이순신 장군이 된 듯 어깨가 으쓱했다.
안분지족.
욕심을 버리고 제 분수를 알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게 이렇듯 수월한 모양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5년이 되어 오는데도 부상 한 번 당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 순전히 욕심 부리지 않고 ‘슬금슬금’ 뛰어 온 내 타성 때문이리라.
앞으로도 은퇴하기 전까지는 코스 다른 하프를 Fun Run하면서 즐기고 싶다.
물론, 옆에서는 “그래도 LA마라톤은 한 번 뛰어 봐야지?”하고 부추긴다.
그때마다 마음이 움찔움찔, 딸막딸막 하긴 한다.
LA 마라톤은 하프가 없어 매번 스포터 팀으로 나가 봉사만 했었다.
언젠가 봉사자가 아니라 선수가 되어 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름하여 대기만성 선수가 되려나.
아무튼, 오늘은 기분이 좋다.
“안 뛰었으면 어쩔 뻔했냐?”는 이진덕 코치님의 농담섞인 얘기도 유쾌했다.
덕분에, 헌팅톤 비치 마라톤과 OC 마라톤 그리고 롱비치 마라톤 등 3대 비치 마라톤을 연달아 섭렵하면 주는 ‘왕메달’ 도 작년에 이어 다시 받았다.
올해는 거북이 왕메달이다.
거북이는 천 년을 산다는 장수 동물이며 반드시 은혜를 갚는다는 인간사하고도 친근한 동물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선물로 알고, 건강 달리미로서 좀더 열심히 살고 인간관계에서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흔히들 하프는 마라톤도 아니라고 농담삼아 폄하하지만, 하프를 뛰는 사람한테는 하프가 풀이다.
풀에 한곗점이 18마일이라면 하프는 9마일이 한곗점이다.
힘든 과정은 다 비슷한 거 같다.
누가 잘 하고 못하고, 대단하고 덜 하고의 비교 대상이 아니라, 나의 환경과 처지에 따라 펀런하면서 건강 달리미로서의 삶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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