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상처는 드러내야 한다

2020.03.03 09:09

서경 조회 수:24


 

상처는.jpg


뛰다가 엎어져, 무릎을 크게 다쳤다. 지난 주 일요일 새벽 6시, 세리토스 공원. 유성은 새 수석 코치님의 깨알 설명과 함께 스트레칭을 하고 공원 두 바퀴를 돌며 몸풀기를 할 때였다.
  이 날 따라, 하필이면 내가 제일 선두에 서게 되었다. 줄이라도 빨리 서 주는 게 코치님을 돕는 일이다 싶어 동작 빠르게 움직였더니 그리 되었다.
  내 뒤로는 여러 수십 명이 따른다. 3종 철인과 보스톤 경력 고수들이 내 뒤에 따라 온다고 생각하니, 심리적으로 좀 부담스러웠다. 혹시, 자세가 틀리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과 함께 뒷꼭지가 부끄러웠다.
  방금 들은 달리기의 바른 자세를 염두에 두며 세 명씩 줄 지어 가볍게 달렸다. 가슴은 펴고, 눈은 정면을 보며 팔은 너무 흔들지 말 것 등.
  한 바퀴 반쯤 돌았을까. 갑자기 퍽 엎어졌다. 빨리 뛰는 것도 아니고, 걸릴 곳도 없는 평지요, 매 번 뛰던 몸풀기 코스다. “어?!” 하는 사이에 사고는 일어났고, 바로 뒤따르던 수잔씨가 간호사답게 재빨리 내 팔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바지를 걷어보니, 왼쪽 무릎은 찰과상인데 오른쪽 무릎은 많이 까져 피가 나고 쓰라렸다.
  달리기 4년만에 부상이라고는 처음이다. 그것도 연습을 빡시게 하거나 기록을 깨기 위해 빨리 달리는 시합이라면 명분이라도 있으련만.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마침, 차에 비상약품을 구비하고 다니는 수잔씨 덕분에 간단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함께 뛰지도 못하고 정성껏 치료해 주는 수잔씨가 고맙고 미안했다.
  모처럼 나왔으니, 함께 식사도 하고 담소도 나눈 뒤 집으로 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다들, 둑방까지 뛰고 들어 오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무릎이 더 쓰라려 왔다. 집에 가서 쉬는 게 낫겠다 싶어, 헌팅턴 비치 마라톤 사진을 받고 가라던 이진덕 코치님도 뵙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하루, 이틀, 사흘... 약을 바르고, 거즈로 덮고 붕대까지 감았는데도 겉만 살짝 닿아도 아프다. ‘하이구, 며칠 고생하겠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언니는 “새 신발을 신고 뛰어서 그러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KART와 이지 러너 초대 팀맘까지 한 언니지만,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새 신발을 신은 지는 불과 한 달 반밖에 안되었지만, 이 신발로 2월 2일 있었던 헌팅톤 비치 마라톤은 무사히 뛰고 오지 않았나.
  또 어떤 친구는 발을 너무 낮게 떼서 그런 거 아닌가 했다.
일리가 좀 있긴 하나, 보폭이나 높이는 내가 늘상 뛰던 자세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엎어지기는커녕, 부상이라곤 없었다.
  성당 언니뻘 친구는 “야, 우리 나이 되면 다리고 어디고 힘이 빠져 잘 엎어져! 그 나이에 달리기 하는 거 무리 아냐?!” 하고 책망 섞인 질타를 했다. “무슨 소리? 다리에 힘 빠져 넘어질 나이는 아니에요! 80살 90살도 잘만 뛰고 있어요!” 하고 나도 대차게 항변했다. 아무튼, 사건 사고 없던 평범한 일상에 이번 일은 우리들에게 조그만 소요를 일으키며 대화의 물꼬를 틀어주었다.
  그러나 저러나, 내가 넘어진 이유는 정말 무엇일까. 높은 곳도 아니고, 앞에 돌이 있던 것도 아니고, 잡담을 나누며 뛴 것도 아니다.
  방심? 모든 사건은 찰나의 방심에서 온다고 하지 않던가. 아니면, 교만? 하긴, 제 코치와 유코치 말이 계속 오디오로 뒤섞여 나와 어느 말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이 말 저 말에 귀를 쫑긋거리며 뛰다가 포기하고 내 식대로 뛴 점이 있긴 하다. 그것도 아니면, 시선을 너무 멀리 두어 발밑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거긴 평진데?
  정말 미스터리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 이유를 알아야, 다음에는 더 조심할 텐데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하다.
이젠,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볼 게 아니라 동전 찾듯 발밑을 보고 뛰어야 하나, 고민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길바닥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 것같다.
  하루 이틀 ... 상처가 쉬이 낫지 않는다. 조심스레 거즈를 떼면, 살점 떨어져 나간 자리에 약간 물기도 고이고 곪은 것처럼 노르스럼한 부분도 보인다. 시간도 걸리고, 낫는다한들 가벼운 흉터도 남을 것같다. 내 걱정을 들은 친구 목사님이 갑자기 일갈을 했다.
  “상처는 그렇게 싸매 두는 게 아녀! 그냥 저기 있는 알로베라 베어 와서 부지런히 문질러!”
  알로베라? 우리 엄마의 만병통치약! 난 왜 여태 그 생각은 못하고 약국에서 사 온 약만 바르고 칭칭 싸매 두었을까. 두툼한 알로베라를 베어 와서 목사님이 상처에 대고 문질렀다.
  “악!”
  차가운 알로베라를 상처에 대고 직접 문지르니 비명이 절로 터져나왔다.
  “애기같이 엄살은!”
  웃으면서 눈을 흘긴다.
  “난, 아프면 파이팅 못해요. 이렇게 아플 바에야 빨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부터 해요! 물론, 이 정도 상처를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고요!”
  다리를 들어 올려주며 내 심적 아킬레스건을 얘기했다.
  “나도 그건 그려! 하하!”
  남은 아파 죽겠는데 목사님은 유쾌하게 웃으셨다.
이틀 동안, 알로베라로 부지런히 문질러 주었더니 조금씩 상처가 아물어 간다. 알로베라가 좋긴 좋나 보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일쯤엔 다시 뛰어도 될 것같다.
  오늘 따라 일찍 눈을 떴다.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알로베라로 문질러 주었다. 알로베라 진이 마르면 또다시 문질러 주며 부지런을 떨었다. 물론, 붕대로 다시 싸매지 않고 상처는 노출해 두었다.
  어느 새 상처가 꼬들꼬들 아물어 가며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갑자기, 정말 갑자기! 목사님이 일갈하시던 말씀이 무슨 은유처럼 강하게 내 머리를 쳤다.
  “상처는 그렇게 싸매두는 게 아녀!”
  그렇다. 육체적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상처는 싸매두는 게 아니다. 드러내 놓고 문제 해결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 곪아가는 상처도 치유가 된다.
  이번 일을 통해서 난 다시 하나를 배운다. 우리 인생에 걱정거리가 생기면, 믿는 이들은 기도할 제목 하나 생겼다며 기꺼이 참아 받는다.
  나도 이번에 생긴 이 작은 상처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상처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싸매두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함께 보이고 의논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길을 찾아가는 것임을. 그러라고 또 이런 경험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주님이 만드신 질그릇, 혹은 데레사 수녀님이 말씀하신 몽당 연필이다. 끊임없이 단련되고 만들어지며, 그 의미를 연필 다 닿도록 대필해 주는 소임을 지녔다.
  때로는, 그냥 감사하라 하면 되지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조건을 붙이냐며 주님께 투정도 했다. 하지만, 주님 말씀이 맞았다. ‘범사에’ 감사할 일이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솟는다.
  우리는 모든 일상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해 간다. 심지어 고통을 통해서도 보람을 느끼고, 불행한 일을 통해서도 주님을 만난다.
  “주님!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에 까칠한 주님이라고 투덜댔던 거 반성하오니, 내 무릎 상처나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애교스런 화살 기도로 이 글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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