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지하철 취객

2020.04.03 17:10

서경 조회 수:20

지하철 취객 2.jpg


   유튜브에 짧은 영상이 하나 올라 왔다. 영등포 지하철 역에 한 취객이 나타나고 이 취객을 두 명의 경찰이 제압하는 모습이다.
  무슨 울분에 찼는지, 젊은 취객은 공무집행 방해라는 경찰의 엄포에도 좀체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취객과 경찰이 밀고 당기며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 벤치까지 밀렸다.
  그때,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취객과 경찰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러나 싸움을 말리려 일어난 청년은 취객에게 소리치는 대신 힘차게 포옹하며 감쌌다. 그는 조용한 말투로 그만하라며 취객을 끌어 안고 코너로 데려 갔다.
  불만에 찬 목소리로 계속 경찰을 향해 소리 지르는 취객을 청년은 어깨를 토닥거리며 애기같이 달래준다. 한 손으론, 머쓱하게 서 있는 경찰에게 가라며 손짓한다. 마치,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태도다.
  몽롱한 취기에도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던가. 울컥해진 취객은 청년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를 보자 터뜨리는 그런 서러운 눈물이다.
  청년은 니 마음 내가 다 안다는 듯이 계속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준다. 아마도, 취객이나 저나 같은 또래의 청년이란 점에 두 사람은 더욱 공감했나 보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해서 영상을 찍어 올렸다. 화난 사람 마음을 풀어주는 건, 물리적 힘보다는 마음을 알아주는 따스함이다. 강함보다 부드러움이 더 큰 힘이 있다. 세찬 바람이 외투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햇빛이 외투를 벗기는 동화처럼 스스로 벗게 해야 한다.
  미국 같으면 가차없이 수갑을 찼을 행패. 한 청년의 온화한 개입으로 더 이상 불상사가 안 일어난 게 다행이다.
  언젠가 유니온 역에서 두 젊은이가 다투는 걸 목격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산한 가운에, 무슨 일인지 두 젊은이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기차 안에서 붙은 시비가 기차에서 내렸어도 이어지고 있었다. 옆에는 각각 걸 프랜드도 있었는데 그들도 서로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사태로 봐서, 두 여자들끼리 붙은 시비가 남자들에게 번져  더 커진 듯했다.
  사람들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서둘러 빠져 나갔다. 나는 그만한 딸자식을 키우는 어미로 그냥 외면하고 지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번듯이 차려 입은 옷매무새로 보아, 저들도 멋진 데이트나 파티에 참석하러 가는 듯 보였다. 싸움으로 기분을 망쳐버릴 애들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육박전까지 불사할 듯 철로길 가까이 밀쳐대는 모습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자칫 한 발만 헛디뎌도 철로에 떨어질 판이다. 게다가, 얼마 전 실족하여 철로에 떨어져 죽은 뉴욕발 기사도 본 터라 가슴이 콩당거렸다.
  싸움을 말려야할 상대는 나보다 키가 한 배 반은 더 큰 젊은이로 흑인애와 히스패닉애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나섰다. 그 중에 좀 순하게 보이는 아이에게 가서 붙었다.
  -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기분 좋은 날이 아니냐! 그리고 걸프렌드도 보고 있는데 이 무슨 창피한 일이냐! 빨리 걸프렌드 데리고 파티나 가렴! 착해 보이는데 니가 참아!
  대충 이런 말을 하고 반대 방향으로 등을 떠밀었다. 마침, 나만큼 작은 체구의 아줌마가 또 다른 녀석을 뜯어 말리고 있었다. 저쪽 흑인 녀석은 소싸움에 나온 황소처럼 입김을 뿜으며 자꾸만 이쪽으로 오려고 씩씩거렸다. 남자들이 좀 말려줬으면 싶었는데, 다들 제 갈길이 바쁜지 아니면 개인주의라 그런지 슬금슬금 피해 가 버렸다.
  히스패닉 녀석 등을 밀어 거리를 더 벌린 뒤, 다른 아줌마랑 합세해서 그 흑인 녀석도 똑 같은 말로 달랬다. 다행히 씩씩거리던 녀석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순순히 떠났다.
  우리 두 키 작은 아줌마는 흐뭇한 미소를 나눈 뒤 헤어졌다. 남자들도 못한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았다. 치고받고 하는 육박전까지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어  발걸음도 가벼웠다.
  여학교 다닐 때는 남자들의 싸움이 너무나 겁이 나서 얼른 피해 버렸는데, 이제는 어미의 마음인가. 누가 다칠까 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 싸움을 멈추고 떨어져 갈 때까지 사태 관망을 하다가 발길을 돌리곤 한다.
  여차하면 나라도 싸움을 말리고 싶고, 혹시 총이나 칼에 맞아도 상관 없다는 결의까지 지니게 되었다. 연륜이 준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르나, 누군가 싸움으로 다치는 게 싫다. 그리고 진정성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리면 아무리 화난 사람도 수그러든다는 믿음이 있다.
  1988년인가.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지강헌 일행 네 명이 탈주하여 인질극을 벌인 대사건이 일어 났다. 1000명 가까운 경찰이 사방을 포위하고 총을 겨눈 채, 자수를 소리쳐 권했다. 여러 명이 다칠 수 있는 이 일촉즉발의 사건은 전국에 생중계로 중계되어 가슴 졸이게 했다.
  같은 종씨라서 그런지 마치 내 혈육의 일인 양 가슴이 찢어졌다. 그때 난 미국에 있는 몸이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죽지 말라고, 경찰에겐 제발 죽이지 말라고.
  비록 그들이 총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겁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을 설득해서 경찰의 사살로부터 막아주고 싶었다. 혹, 내가 죽어도 상관 없다는 순교자적 생각도 들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는 그들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모자가 같은 종씨라 더욱 마음이 쓰였다.
  결국, 죽음으로 끝난 사건을 신문에서 읽고 나는 털썩 주저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Bee Gees의 홀리데이를 들으며 죽어간 지강헌을 떠올리면 가슴이 쓰리다.
  그들은 탈옥수에 인질극을 벌인 사회적 흉악범이지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뿐인가. 제일 어린 멤버 강영일에겐 총으로 위협까지 하며 자수를 권해 목숨을 건져 주고 갔다. 저들은 경찰 포위의 압박으로 끝내 목숨을 포기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양심마저 저버린 파렴치범은 아니었다.
  경찰서장이나 그 누군가가 끈기와 신념을 가지고 사랑으로 설득했다면, 분명 그런 비극으로 끝나진 않았으리라. 사람 마음을 달래는 도구로, 사랑보다 더 큰 무기는 없다. 한 청년의 포옹이 다시 한 번 이런 믿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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