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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백호의 유언

2020.04.18 13:21

라만섭 조회 수:44

백호의 유언

 

16세기 조선조(선조) 전라남도 나주(羅州)林悌(1549~1587,號 白虎)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주목사를 지낸바 있는 林晉이다. 선천적으로 자유분방하고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호탕한 성격을 타고난 그는 과거 시험에 몇 번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을 하곤 하였다.

 

장성할 때 까지 섬기는 스승이 없던 임제는 22세에 속리산에 입산하여 成運이라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성급한 제자의 성격을 순화시키고자 스승은 임제에게 中庸을 팔백 번을 읽도록 종용하였다. 임제는 6년 동안 중용을 깨치고 하산하여 과거에 급제한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가 산을 떠난다(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라는 표현은 당시의 그의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거듭되는 사화와 당파싸움에 세월 가는 줄 모른는 시국을 한탄하며 임제는 시와 술로 을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강직한 성격으로 타인을 섬기기를 싫어한 그는 점차 벼슬에 뜻을 잃고 세상을 주유하는 풍류객의 삶을 이어갔다. 그는 칼과 거문고를 어깨에 둘러메고 글로써 권력을 비웃으며 천하를 주유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는 시국을 한탄하며 시와 술로 울분을 토하던 그가 35세 되던 해 서북도 병마평사를 제수 받고 임지로 향하던 중 기생 황진이의 부음을 듣는다. 백호는 그녀의 무덤 앞에 다음의 시조를 올린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듯 누운 듯/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들어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어명을 받고 임지로 향하던 사대부가 관복을 입은 채로 천한 기생의 무덤에 잔을 올린 일로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어 파직되는 빌미를 주기도 하였다.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고 호탕한 성격의 그는 술과 기방 출입을 즐겼으며 피리를 옆에 차고 준마에 올라타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세월을 보내는 여유를 지닌 당대의 풍류객이었다. 오랜 지병(해수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뒤로 한다. 큰 벼슬을 하지는 못했으나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글로써 권세를 조롱하던 백호 임제의 짧은 삶은 이렇게 끝난다. 사육신의 혼령을 불러내 간신들을 비판한 소설인 元生夢遊錄을 비롯 花史, 愁城誌등의 소설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그가 삶을 마감하면서 남긴 유언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뭇 오랑캐들이(:몽고족,만주족 등)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데 조선만 홀로 중국을 섬기는 터에, 살아서 무엇 하며 죽은들 뭐가 한이 되랴. 울지 말라(四夷八蠻 皆爲稱帝 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恨 勿哭).’ 임종을 앞에 둔 그의 이 같은 물곡사(勿哭辭), 뒤에 역모의 빌미를 주었고 실학의 씨앗이 되었으며 지식인에게 일말의 위로가 됨으로써, 위대한 유언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백호 임제는 기이한 사람으로 법도에 어긋난 삶을 살다 갔다고 보는 일부의 비평가도, 그가 남기고 간 글을 높이 평가하는 데에는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사대사상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당시의 권세가를 엄하게 꾸짖는 그의 유언은,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바가 없지 않다고 하겠다.

 

 

 

 

 

20203

 

 

: 이 부분은 한국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땅의 역사를 참조한 것임 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