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벽돌집 (2장)

2021.09.26 11:51

최영숙 조회 수:21

                                                                    2

 

<말리 안 식당>

 

  카우보이 문을 밀고 주방으로 들어서자, 그릴 위에서는 버터 향을 물씬 풍기며 얇게 썬 감자가 익어가고 있었다.

하이, 헥터!”

굿모닝, 마마 영!”

희랍인 요리사, 헥터가 감자를 뒤집으면서 그릴의 반을 가리고 있는 대단한 크기의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소리쳤다. 나는 스킴 밀크와 크림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헥터! 패밀리 파티 준비는 잘 되어가?”

물론이지! 땡큐!”

내가 묻는 말에 헥터는 잡고 있는 뒤집개를 높이 들어 흔들었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주말마다 모인다. 특히 이번 주말에는 헥터의 고향, 에게 해 섬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미국에 처음으로 다니러 온다고 흥분해 있었다. 할머니가 그곳에서 만들어 보내는 하얀 치즈를 덩어리째로 뜯어먹고 난 다음, 아래로 내뿜는 가스를 참지 못 하는 일만 아니라면 헥터는 흠잡을 데가 없는 요리사이다.

좀 우울한 무드에 가라앉는 날이거나, 손님과 일으킨 작은 충돌로도 세상이 내게 등을 돌린 것 같은 날, 그럴 때, 헥터를 찾아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벌써 새 기운을 얻게 된다. 분명 그가 가진 마술의 힘은 그를 키워 낸 그리스 섬마을의 작열하는 태양 볕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이, 마르티나!”

붉은 리본이 달린 고무줄로 새까맣고 긴 머리를 말끔하게 올려 묶은 과테말라 아가씨, 마르티나가 조리대 위에 놓인 플라스틱 통에 달걀을 깨트려 넣으면서,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마르티나를 볼 때마다, 나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까만색이다. 커다란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눈앞에 아메리칸 걸인형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순한 눈빛이 좋다. 약간은 서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줍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주방 안쪽, 냉장고가 있는 창고에서 채소를 고르고 있던 멕시코 청년, 토마스가 이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꼬모에스따! 라고 소리친다. 나는 토마스에게 무이비엔,이라고 대답하고 주방을 나왔다. 토마스는 하는 일이 많았다. 부주방장이면서 벤과 함께 창고를 맡고 있는 그는 주방 안팎을 드나들며 궂은일은 거의 도맡아 했다.

토마스가 손으로 직접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그릴에 구워주는 또띠야에서는 친근한 냄새가 났다. 아침 메뉴로 또띠야에 모짜렐라 치즈만을 넣고, 만두처럼 반을 접어 그릴에 구워내는 케사디야와 점심에 나가는 매운 해물수프는 토마스의 작품이었다.

 열여섯 살에 이미 아버지가 된 토마스는 바지를 엉덩이에 반쯤 걸치고 모자를 뒤로 돌려쓰고 다녔다. 작은 키에 목이 굵고 짧은 토마스는 구레나룻과 함께 턱수염을 가운데만 길게 기르고 어깨를 건들거리며 걸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반질반질 기름기가 흘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듯이 느끼하고 뻔뻔한 표정이지만, 활짝 웃을 때만큼은 신기하게도 그 얼굴의 느끼함이 사라졌다.

토마스의 일곱 살 난 아들은 지금 토마스의 고향, 멕시코 남쪽 산동네에서 할머니하고 살고 있다. 토마스가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온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아내가 가난이 싫다고 자식까지 버리고 도시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난 지금, 아내의 얼굴조차 잊고 산다고 말하는 토마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 도시에 집을 사고, 식당을 경영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얼굴을 잊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는, 착하고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같이 돌아갈 거라는 꿈도 간직하고 있었다.

벤의 후원으로 일 년 전에 노동허가증을 받은 그는 이제 석 달만 더 고생하면 이민 중개인의 빚도 다 갚는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돈을 모으기 위해 클럽에도 가지 않겠다고 토마스가 말했다. 뭐야, 그럼 여태 클럽에 다녔어? 하는 내 말에 토마스는 킥킥 웃으면서, 마마 영이 이 근처에 클럽 하나 차리면 내가 단골손님 할게요, 그러면 뉴욕까지 주말 원정 안 가도 되겠네, 라고 말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데다 습도까지 높은 그의 고향에는 일거리가 없어 농땡이를 피울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했다. 낮에는 옥수수 밭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길가에 모여 앉아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차차차 춤도 추고, 그렇게 말하면서 토마스는 금방 엉덩이를 흔들며 스텝을 밟았다.

 " 베사 메, 베사 메 무초, 고요한 그날 밤 리라 꽃 지던 밤에, 내게 키스를 해주세요, 무초."

내가 부르는 한국말 노래에 토마스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나는 라쿠카라차도 불렀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우와! 그 노래도 알아요?”

그럼, 우리 중학교 음악 책에 있었어.”

그러자 토마스가 장난스럽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건요, 바퀴벌레가 마리화나를 못 피워서 기운이 없다는 노래예요, 이렇게요. 먹을 게 없어서 비틀거리는 우리 같은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말한 거지요. 혁명가 판초 비야가 와서 까란사의 군대를 쫓아낸 거예요. 디네로, 돈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어디 가서 벌어요. 지금도 우리 동네에는 옥수수 밭에서 일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무초 깔리엔떼, 일이 너무 힘드니까 마리화나 피우고, 데킬라 마시고 그러는 거죠.”

토마스가 킥킥 웃었다. 나는 그의 쌍꺼풀 진 커다란 눈 속에서 뜨겁고 노란 태양을 들여다보았다. 배고파도 더워도 힘들어도 그리운 모국의 하늘. 그럼에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가지가지의 이야기가 그의 눈 속에도 하나 가득이었다.

나는 주방에서 나와 앞치마를 꺼내 입고 밀크와 크림을 각기 보냉 크리머에 부어놓았다. 바구니에 냅킨을 보충하고, 후추와 소금 통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일상적인 아침이었다. 벤이 들어왔다. 배를 내밀고 걷는 모습은 여전했다. 실내가 갑자기 훈훈해졌다. 존 메이어의 노래가 벤의 어깨를 넘어 홀 안에 퍼져 나갔다. 다소 거칠고 섹시한 그의 목소리에 실린 노래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누가 그래,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고.

나였던 모든 것들로부터,

내 역사를 다시 쓰는 거야.

누가 그래,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고...”

  내 속에서 잠자던 또 하나의 내가 짐을 꾸려서 떠난다. 내가 떠나온 한국땅에서 몽골의 사막을 지나,시베리아 벌판의 자작나무 숲을 건너,  베링 해에 있는 세인트로렌스 섬을 넘어 알래스카로, 로키 산을 타고 내려와 콜로라도 주를 지나고, 캔자스를 지난 다음 동부로 달리다가... 그리고는 결국, 이곳 메릴랜드 주, 삼백 년 전, 앤 여왕의 이름에서 유래한 바다 쪽 끄트머리 도시, 애나폴리스로 다시 돌아온다.
애나폴리스, 부두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돌아오는 일상. 비일상적인 일들을 노래하는 것은 일상에 대한 싫증, 혹은 슬픔이나 메마름이 주는 답답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유지해내지 못한 무력함과 인내의 부족함이어서, 그래서 뛰쳐나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것에 대한 회한은 아니었을까....

 
세무 공무원으로 은퇴한 워렌과 그의 부인 베티가 우물우물 빵을 씹으며, 오늘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다. 워렌 부부는 대체로 말없이 먹고 마신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로 굳게 결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변함이 없다. 그런 워렌이 입을 열 때는 대부분 팡그로스의 대사를 읊을 때이다.

알고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여기, 이 최선의 곳에서 최선의 삶을 누리며 사는 거라오.”

워렌은 재킷 속에 늘 하늘색 셔츠를 받쳐 입고 있다. 그래 그런지 나는 워렌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블루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하얀 얼굴에 은색 머리카락, 그래서 눈썹조차도 은색이었나 하고 가끔 생각하지만, 확인해 본 적은 없다. 그만큼 그의 얼굴 윤곽이 희미했다.
그가 만일 흰색 셔츠를 입고 나타난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워렌의 부인 베티의 얼굴에는 부자연스러운 주름살이 많았다. 그녀의 눈과 마주치면 나는 대개 움찔했다. 말없이 건너다보는 그녀의 짯짯한 눈초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가끔 홀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럴 때는 대부분 목소리가 큰 누군가가 그녀의 조용한 식사 시간을 방해했을 때이었다. 그녀의 드문 금발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잘 받쳐주었다. 발레리나였다는 그녀와는 한마디 말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입을 열 때는 워렌, 하면서 꼿꼿한 자세로 뭔가를 지시하거나 요구할 경우뿐이었다.

  후드 티를 입은 남자가 딸랑, 하고 방울 소리를 내는 문을 흘겨보면서 들어왔다. 그는 오늘도 역시 시끄러운 문짝이 마땅찮다는 눈초리였다. 여전히 까만색 긴 코트를 후드 티 위에 걸쳐 입고, 꼬깃꼬깃한 편지봉투를  들고 있다. 그가 카운터로 똑바로 걸어 들어와 흰 봉투를 열었다.
후드를 푹 내려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주 천천히 돈을 꺼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는 이름이 없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를 후드 티스트리트 버디라고 부른다.
잔돈을 거슬러 줄 때, 나는 손님의 얼굴보다는 손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손바닥에도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드물게 말해주는 손이 있다. 그 사람의 손이 그랬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복잡한 눈길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이 없다. 오늘도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크루아상을 가리켰다. 나는 크루아상 샌드위치라고 적은 종이쪽지를 주방으로 들이밀었다. 아무도 그의 나이를 짐작 못했다. 길게 자란 회색 턱수염은 물론, 귀밑에서부터 시작한 수염으로 뒤덮인 작은 얼굴은, 마치 비 내리는 날, 창턱에 올라앉아 있는 고양이를 연상하게 했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이곳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겨울에는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가 봄이 되면 벗는다는 것, 그리고 사철을 후줄근한 면바지와 후드 티로 지낸다는 것과 부두의 벤치에 앉아있기도 하고, 메인 스트리트는 물론 웨스트 스트리트를 서성이거나, 쇼윈도를 기웃거리기도 한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사항이 없다. 그는 표정이 없다. 단지 매사가 뒤틀린다는 표현만큼은 확실했다. 아무튼,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벤이 부둣가 동상 곁에 앉아있는 모습만큼이나 회화적이었다.
그는 샌드위치를 들고, 아무에게도 이름이 없고 자신에게도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무게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 속으로 흘러들어가 사라졌다.

  주방에서 나온 벤이, 크림치즈를 잔뜩 바른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며 내게 말했다.
마마 영, 에덴은 말이죠...어쩌면 다른 은하계에서 온 거대한 우주선 모함이었을 지도 몰라요..."
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곧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 때문인지, 벤의 뜬금없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 좀 모자라는 애 아니에요?”
지영이가 벤을 처음 보던 날, 내게 한 말이었는데 나는 그 말에 기분이 좀 언짢았다.
너무 순진해서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지영이 말대로 벤이 조금 모자라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비가 온 날 버섯처럼 소복이 돋아난 적의라든가, 이기적인 마음, 교만한 눈, 거짓말하는 혀와 같은 불순물들이 빗물에 씻기듯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선악과 때문에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에덴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그건 거기 있던 그룹들과 화염검 때문이었잖아요. 그건 바로, 열을 내뿜고 있는 비행 물체였을 거예요...”

벤의 말이 끝나자, 에덴동산이 하늘로 떠나버린 이 땅위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나는 에덴동산을 잃은 존재들의 외로움에 대해, 쓸쓸함에 대해 안전장치가 풀어진 채로 풀풀 날리는 눈발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갔다.

  경기도 이천 근처에 있는, 문학 서클 언니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거짓말처럼 밤새 눈이 내려서 온 천지는 물론, 댓돌 위에 벗어 놓은 구두 속에까지 보송한 눈이 가득 차 있었다. 안마당에는 이미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타닥타닥, 사랑방 아궁이 쪽에서는 청솔가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를 따라 부엌에서 굽고 있는 김 냄새가 풍겨왔다.
머잖아 청솔가지 타는 냄새가 안마당에 가득 차올랐다. 막 퍼져 나가는 햇살 아래에서 쌓인 눈은 반짝였고, 따끈한 방안 장판에서는 콩댐 냄새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따스하고, 안정되고, 평화롭기까지 한 기운이 내게로 번져왔다.

  그 기운을 받은 나는, 십 여리 길을 걸어서 읍내로 나가자고 언니를 유혹했다. 읍내에 가서 버스를 타고, 용인에 사는 남자선배 집을 찾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 선배는 시인이었다. 언니는 그 선배 시인이 이룬 현란한 언어세계의 유일무이한 신도였다. 이래저래 의기투합된 언니와 나는 씩씩하게 눈길을 나섰다. 지름길로 자신 있게 들어선 언니가 얼마쯤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고 실토를 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벌판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렸으나, 오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적요였다.  폭설에 밤새도록 온기를 빼앗긴 벌판에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도, 두려울 정도로 고요한 눈벌판에 바로 흡수되어버렸다. 눈도 냄새가 있었다. 공기 속에 퍼져있던 여러 냄새를 누르고 내려앉은 눈 위에서는 쩡, 하고 가슴을 훑어 내리는 날카로운 향이 올라왔다. 결국, 우리는 두 시간이나 걸려서 읍내에 도착했고,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다방으로 걸어 들어가 난롯가에 간신히 버티고 앉아 있기는 했으나,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테이블에 엎어져 실신한 것처럼 잠이 들어버렸다.

그 후, 언니는 우상이었던 그 시인과 결혼했다.  언니에게 교주와 같았던 시인은 어찌 된 셈인지, 시를 써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구실로 종종 집을 떠났고, 언니는 아름다운 시인과 결혼한 일로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언니네 고향 집, 콩댐냄새가 가득한 그 방 아랫목에 앉아, 하얀 쌀밥 위에 광천 김을 얹어 먹으면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꿈꾸듯이 얘기했었다. 사랑하는 미지의 사람. 가슴 속에 묻어 둔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마치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백합꽃 향기가 주위에 가득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랬던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시인은 밥을 먹고 사는 일과 자식을 키워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인은 일상을 아름답게 노래했을 뿐, 시를 핑계 삼아 떠나는 방랑벽을 끝내 고치지 못했다. 이른 아침에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물을 데워주던 어른이 상심으로 쓰러져 세상을 뜨고 나자 언니네 옛집은 굳게 대문이 닫혀버렸고, 이내 냉기가 감도는 폐가가 되어버렸다.

  결국, 선배 언니를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서야, 나는 밥 짓는 냄새와 김을 굽는 냄새, 그리고 청솔가지가 타는 향이 가득 차있던 안마당이야말로, 내 젊은 날의 뜨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평안, 위안이 함께하는 소통, 기대와 사랑, 그리고 충만과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치고 낙심될 때마다 잠잠히 나를 붙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탕!  소리가 잠깐의 간격을 두고 두 번 들려왔다. 삽시간에 정적이 밀려왔다. 메인 스트리트를 오가는 발길도, 식당 안의 말소리도 멈춘 순간, 헥터가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헥터가 내지른 그리스어를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모두의 얼굴에 공포와 호기심이 뒤얽혀 갔다. 그 중의 몇 사람은 의자를 넘어뜨리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벤이 헥터를 밀치고 주방 쪽으로 뛰어 들어가려 하자, 식당에 남아있던 몇 사람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 안돼! 경찰을 불러!”

토마스였다.  마르티나에게 먼저 총을 쏘고, 자신의 머리에도 한 발을 쏘았던 것이다.

구조대와 함께 경찰이 도착하고 구급차가 건물 뒤로 들어간 다음, 식당 앞에는 노란 줄이 쳐졌다. 주방 뒷문으로 하얀 눈 위에 놓여있는 두 개의 검은 비닐 백이 보였다. 이층에서 달려 내려온 벤의 할머니, 아베나 부인이 비틀거렸다. 부인은 벤의 부축을 받고 서서 흰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의 폭넓고 긴 꽃무늬 스커트가 발에 밟힐 듯 위태로워 보였다.

경찰이 주방 뒷문 가에 서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몇 마디를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헥터가 뭐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도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경찰이 되물었다. 신통한 답을 얻지 못했는지, 그가 동료를 부르고 세 번째 경찰은 우리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현장에는 저 두 사람만 있었던 게 확실하지요?”

유일한 증인인 헥터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구급차가 떠나고 주위에 둘러 서있던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그때, 우당탕 소리를 내며 조리대 위의 팬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팬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아베나 부인이 아니라, 벤이었다. 벤은 조리대를 붙들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냉정함을 회복한 아베나 부인은 침착했다.

보보! 괜찮지? 아니, 그냥 앉아있으렴.”

아베나 부인은 오히려 나를 향해 염려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헥터가 아베나 부인과 함께 벤을 부축하여 이층으로 올라가고, 그동안에 나는 부인이 맡긴 열쇠 뭉치를 들고 문을 잠그고, 가스 불과 냉장고 온도를 점검한 다음, 주방에 나와 있는 음식재료를 정리하고 실내등을 껐다.

이 층에서 어두운 얼굴로 내려온 헥터가 밤색의 가죽 재킷에 짙은 초록색의 물방울무늬가 총총한 목도리를 두르며 말없이 문을 나섰다. 운명은 정말 헤라클레스라도 못 이기는 법이었을까, 라고 나는 헥터에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우람한 헥터의 뒷모습이, 오늘은 무겁고 어두우면서 움츠러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헥터마저 가버리고 나자,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일도, 모레도, 늘 같이 있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벌써 지나간 일이다.

  호세 마르티.  시인은 들려주고 싶었다. 그 사랑에 죽어간 과테말라 소녀이야기를.

“... 백합의 가지가 뒤덮인 곳에

물푸레나무와 재스민으로 장식된

그곳에

소녀는 매장되었다.

비단 상자에 누워 있는 소녀가 매장되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 죽음 뒤에서 설명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이미 단순과거로 이 모든 일이 끝나버린 것이다.

나는 배도 고프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에는 토마스와 마르티나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아무래도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면서 후들후들 떨렸다. 뒷목이 당기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만 같았다.

나는 문득, 헥터가 눈짓을 하며 주방 창고 쪽으로 가는 나를 가로막던 일을 생각했다. 그럴 때는 영락없이 귀여운 마르티나가, 토마스가 일하는 안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허둥지둥 걸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아랫입술 밑이 발그스름해져 있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나와 헥터는 얼른 딴청을 피웠다.

저렇게 그냥 둬도 괜찮나...”

나는 마르티나의 뒷모습을 보며 헥터에게 물었다.

운명은 헤라클레스라도 못 이기는 법이라오.”

헥터는 배를 툭 내밀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마르티나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남자 친구 라파엘은 볼티모어 시내에 있는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했다. 일이 일찍 끝나는 날에는 차를 끌고 마르티나를 데리러 왔다. 라파엘은 과테말라에서 왔다. 그는 콧수염을 길러서 그런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였다. 나는 그가 녹슬고 찌그러진 도요타 트럭 안에서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며 마르티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의 구부정한 등판에서는 일찌감치 사그라져 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뒷덜미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왜 결혼 안 해? 라파엘하고.”

언젠가 짓궂게 내가 물었을 때 마르티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한번은 마르티나가 설거지를 하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마르티나,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이자 그녀가 갑자기 내 가슴으로 쓰러져왔다.

마마 영.....”

무슨 일 있구나, 마르티나...?”

마르티나는 이미 라파엘의 아기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예요. 성모 마리아, 그 분이 내 아기를 보호해 줄 거예요.”

성모 마리아라는 말에서 마르티나는 더욱 흐느끼며 울었다.

 나는 간신히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열쇠 뭉치가 찰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자주색 카펫이 덮여있는 나무 계단이 심하게 삐걱거렸다. 계단 위에서 바닐라향이 강하게 풍겨왔다. 촛불 향이었다. 이 층은 생각보다 밝았다. 하얀 면 커튼이 얌전하게 양쪽으로 젖혀져 있는 거실의 창문으로는 창문 크기만큼 바다가 내다보였다.
 
객실은 아주 작았다. 가구로는 이인용 침대가 하나씩 들어가 있고 그 옆에는 스탠드램프를 올려놓는 테이블 하나, 그리고 삼단 서랍장과 벽에 달린 거울이 전부였다. 각 방은 각기 다른 문양의 벽지를 발라서 그런지 서로 달라 보였다. 연분홍, 보라, 연두색의 벽지를 바른 방들은 예스러우면서 대체로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벤은 다른 객실과 크기가 별다를 바 없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창문은 바다 쪽으로 나 있고 방 벽지는 엷은 주황색이었다. 서랍장은 침대 옆 좁은 자리로 밀려나 있고 서랍장이 놓였던 자리에는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무선통신 장비가 잔뜩 올라가 있고 책상 옆에 놓인 장식장에도 비슷한 장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전파는 안테나를 통해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다

벤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까.... , 쓰러져 있는 마르티나 눈하고 마주쳤어.... 그냥 어리둥절한 눈빛이었어... 그 아이는 자신한테 생긴 일이 무엇인지 몰랐던 거야...”

그래, 아가야, 그런 거란다. 나쁜 일은 어느 날, 덫같이 그렇게 찾아오지. 내일도 이렇게 똑같은 날이 올 거라고 다들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지만, 죽음은 사납게, 누구에게나 주저 없이 그렇게 오는 거란다. 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란다, 보보야, 네 탓이 아니란다.”

아베나 부인이 벤의 눈가에 번진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벤이 아베나 부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야! 노오! !”

벤은 악을 썼다. 마흔 살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삼백 파운드가 나가는 대 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치면서 울고 있었다. 행동은 물론 목소리마저 어린애로 돌아가 있었다. 얼굴은 작은 악마처럼 구겨지고, 구겨진 틈마다 들어찬 분노와 치기가 눈물과 함께 범벅 되어 있다. 베개를 내던지고 옷을 집어던졌다. 아베나 부인은 침착하게 베개를 집어 올렸다. 어린아이는 점점 심하게 울다가 숨이 막히는지 땀을 흘리며 몸부림을 쳤다.

난 수잔 숙모한테 갈테야, 수잔 숙모한테 갈테야!”

책상 위에 놓인 트랜시버에서는 쉬지 않고 계기판이 움직였다. 전파 잡음과 함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지만 외계인의 말처럼 낯선 톤이었다. 전파가 방안을 휘저었다.

아베나 부인이 조그만 치의 동요도 없이 일어나서 송수신기의 전원을 껐다. 그런 다음 벤의 손을 끌어당겨 가슴에 안고 어깨를 다독였다.

보보!  울음을 그쳐라...내 베이비, 예쁜 베이비...”

아베나 부인이 노래를 불렀다.

“.....더 맨 인 더 무운, 그 사람이 달에서 내다보며 말했지. 이제 내가 일어날 시간이 되었네. 아가들은 모두 침대로 들어가야 한다네....”

부인의 노래가 낮고 느리게 반복되고 벤이 울음을 그치는 기미가 보이면서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베나 부인이 침대 바닥을 톡톡 두드리자 벤은 그 위에 천천히 드러 누웠다.

  내게는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처럼 여겨졌다. 마치 유리창 너머로 연극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벤을 자리에 눕힌 그녀는 차분하게 일어나서 벤이 내던진 모자와 재킷, 지갑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보보가 아직 어려서 이런답니다.”

부인이 벤 옆에 걸터앉아서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양쪽 귀의 뒤편 아래쪽을 지그시 눌러주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양쪽 다리의 복숭아 뼈 바로 아래 안쪽과 바깥쪽을 동시에 눌렀다. 나는 놀란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는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경혈이었다.

이건 할머니에게서 배운 거예요. 잠이 잘 오게 해주거든요.”

아베나 부인은 벤에게 차를 한잔 가져다줄 테니 그걸 마시고 잠을 좀 자라고 말했다. 부인은 내게 나가자고 손짓을 하며 방을 나섰다. 다리를 옮기자, 나는 잠시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나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과자 냄새가 곳곳에 스며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바다색 법랑 주전자에 물을 담아서 불 위에 올려놓았다. 물이 끓을 동안 파란색 띠를 두른 두 개의 찻잔을 꺼내 놓고, 크림색 사기병에서 찻잎을 조금 집어내었다. 유리 탕관 안의 그물망 속에 차를 집어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우유를 조금 넣겠어요?”

부인이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며 주방을 둘러보았다. 주방 캐비넷 위쪽의 여백에 주물로 된 냄비 받침이 걸려있었다. 둥근 형, 사각형, 마름모, 반원형, 받침은 여러가지 모양이었다.  주전자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베나 부인은 어느새 흰색 레이스가 둘려있는 노란 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저건 우리 어머니의 수집품이지요.”

부인이 냄비 받침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열세 개에서 그치고 말았지요. 어머니의 생애는, 바람둥이 아버지하고 일찍 이혼하고 난 뒤 혼자 다녔던 여행지에서 저 열세 개의 냄비 받침을 만나는 거로 끝나버렸어요.”

나는 두 개의 찻잔을 들고 주방을 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부인은 내 찻잔에 먼저 물을 부어주고는 들고 나온 머그잔에 물을 부어서 차 봉지를 집어넣었다.

이건 잠을 불러오는 차예요. 벤에게 갖다 주고 바로 돌아올게요. 사실은 아주 걱정이랍니다. 벤이 너무 어려서요.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데...”

부인이 찻잔을 들고 벤의 방으로 갔다. 나는 찻잔을 들고 일어서 거실로 나왔다. 거실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 액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다가갔다. 벽면의 가운데에는 흑백 사진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주위로는 컬러 사진들이 빙 둘러 걸려있었다.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간 벤의 조상이, 사진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웃고 있거나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벤을 많이 닮은 검은 색 피부의 건장한 남자가, 흑갈색 머리카락의 호리호리한 여자와 함께 튤립 화단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아마 벤의 부모일 것이다. 그 위에는 아베나 부인과 부인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군복을 입고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검은 피부 속에서 그의 눈빛이 타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분명 열정적이고 보수적이며 총명한 애국자였을 것이다.

누구일까...그 아래 걸려 있는 사진 속의 남자는 조용한 얼굴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끝이 과장스럽게 치켜 올라간  눈썹을 가진 체격 좋은 여자가  쌍꺼풀이 진 눈에 청색 섀도우를 짙게 바르고, 검은 색 머리카락을 잔뜩 부풀리고 서서 고개를 약간 남편 쪽으로 장난스럽게 기울이고 있었다

아베나 부인이 벤의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부인은 앞 치마를 벗어서 손에 들고 사진 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꽃무늬가 프린트 된 긴 치마 위에 크림색 스웨터를 입은 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부인은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남동생, 토니예요. 텍사스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절 닮지 않았지요? 동생은 할아버지를 닮았어요. 성품까지도요. 토니 옆에 있는 여자는... 수잔이에요. 

! 아까 벤이 말하던...”

부인의 시선과 눈이 마주친 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시선에서 어쩐지 수잔에 대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른 중앙에 있는 흑백 사진으로 눈을 옮겼다. 사진 속에는, 목이 높은 흰색 턱시도 셔츠에 까만색의 폭넓은 애스콧타이를 매고, 비단 조끼를 입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정면을 향해 서 있었다. 그의 검은 색 이마에는 옆으로 깊게 파인 두 가닥의 주름이 있고, 콧방울이 단단해 보이는 코가 전체적인 얼굴의 균형을 잡고 있으며, 쌍꺼풀진 눈에는 친절, 관용, 겸손 등과 같은 덕목이 가득 넘쳐흘렀다. 입은 꾹 다물었어도, 이 남자는 행복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호감은 바로 그 웃음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신사에게서 눈을 돌린 순간, 내 시선은 그 옆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여인에게로 가서 고정되었다.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굴도 작고, 눈도 작아 보이는 여자가 물방울무늬의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녀는 한국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머리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쪽 찐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인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애를 쓴 모양이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드러나게 예쁘지는 않아도 곱상해서 친근감을 주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 분은 코리안이에요. 내 할머니랍니다.”

말을 마치면서 아베나 부인이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뭔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미소였다.

부인이 ! 잠깐만이요.”라고 말하면서 입구 쪽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작은 나무상자를 들고 나왔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상자는 그 속에 담긴 시간을 말해주듯 반질반질하게 길이 들어있었다.

이리로 와 봐요.”

부인이 상자를 들고 거실에 놓인 갈색 가죽 소파에 가서 앉았다. 나는 부인의 옆으로 갔다. 부인이 차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내 입에서 아! 하고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하마터면 찻물을 쏟을 뻔했다. 얼른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상자 속에는 백동 비녀와 함께 얼레빗, 그리고 참빗이 들어있었다. 빗들은 이가 빠지고 끝이 닳아 있었다. 빗살에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던 날, 흙 마당에서 피어오르던 먼지내가 풍겨왔다.

할머니가 아끼던 물건들이지요.”

아베나 부인이 조심스럽게 비녀를 들어 올렸다. 풀잎 문양이 점선으로 음각된 비녀는 진회색으로 변하여 원래의 색은 잃었지만, 예전에는 분명히 밝은 은색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특별한 날이면 이것을 사용하셨어요. 언젠가 할아버지가 이것을 꽂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예쁘다고 하면서 꽃을 꽂아 주었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질색하고 꽃을 빼어버렸어요. 당연히 할아버지가 섭섭해 했지요. 할머니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말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머리에 꽃을 꽂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라고요. 정말 코리아 문화가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나도 어머니가 머리에 꽃을 꽂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마사지하는 일을 즐겁게 하곤 했지요. 누구든 할머니의 두 손에 발을 맡기고 나면, 맘이 느슨해지고 편안해져서 잠이 들기도 했어요. 생각해보니, 그분은 마술사의 손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분은 지금 보보가 쓰는 방에서 살다 가셨어요. 바다가 내다보이는 작은 방을 늘 꿈꾸던 할머니는 이 집에서 겨우 한 달을 살다가 떠나셨어요. 그때 할머니는 내 품에서 눈을 감으셨지요....마치 기차가 멈추는 것 같았어요.... 내 어머니는 평생 번 돈으로 이 건물을 사들이셨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살아있을 동안에 바닷가에 집을 장만하려고 무척 애를 쓰셨어요. 할머니는 창문으로 바다를 내다보면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지요. 바다를 가리키면서 저기로 곧장 가면 어디가 나오느냐고 내게 묻고는 했어요. 유럽이 나온다고 하니까 무척 섭섭해 하시더군요....”

나는 비녀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거무스름하게 변한 백동비녀 위로, 거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첫눈 내린 애나폴리스 부두의 긴 하루가, 너무나 긴 하루가, 어제나 그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비늘처럼 반짝이는 수면 위로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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