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불합격

2021.10.01 06:27

조형숙 조회 수:4

후배의 시아버님이 캐나다에서 소천 받으셨다. 열흘 정도의 계획으로 다녀와야 하는데 함께 살고 계신 친정어머니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 후배의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셨고 대화도 별로 없으신 분이다. 누구에게 부탁하고 떠나야 안심이 될지 생각하고 생각하던 중 나를 떠올렸다고 하면서 부탁했다. 코로나의 긴 시간이 지루하고 답답하던 차에 흔쾌히 보살펴 드리기로 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양로보건센터의 프로그램 플랜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양로보건센터는 지금은 모이지는 않고 대신 점심 도시락을 각자 집에 배달하고 있었다. 매일 1130분이면 틀림없이 센터의 도시락과 공붓거리를 놓고 갔다. 식사는 꽤 괜찮았고 깔끔했다. 문 앞에서 기다려 도시락을 가지고 들어가 잡수시게 하고 약도 챙겨 드렸다. 노래도 함께 하고 책도 읽어 드렸다.

 

사람은 혼자 있기 좋아하는 유형과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를 맺고 함께 어울리면서 에너지와 열정을 채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나의 경우는 집에만 있기에는 답답한 유형이다. 함께 합창하고, 읽은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성경을 외우는 시간들이 활력을 준다. 혼자 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불나방처럼 열성을 내다가 곧 기력을 잃는다. 함께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하고 말문이 트인다. 학창시절에 베스트셀러였던 김홍신 작가의 인간시장이 잠시 기억에 떠오르며 센터가 궁금했다. 책의 내용은 다 잊었지만 호기심이 많은 주인공이 사회 곳곳을 살펴 알아가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후배의 어머니를 돌보면서 센터에서 하는 일에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감성을 함께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수업료 없이도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식사가 마련되니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능력이 점수화되는 시험도 아니고 인간이 숫자화 되는 사회도 아닌 공동체의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곳인지 알아보고 싶어 서류를 만들어 보냈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날 센터에서 차가 왔고 오전을 그 곳에서 보냈다. 서류를 접수한 10여명이 모였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놀이를 하고 숫자를 맞추고, 단어를 네모 칸에 넣고, 숨은 그림을 찾는다. 무용을 곁들이는 동요를 배운다. 학습 능력 정도의 차이는 한 눈에 표가 났다. 나이가 같다고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나는 오히려 어린아이가 될 것 같았다. 옆 사람을 내가 도와야 할 것 같았다. 좀 갑갑했다.

 

일주일 후 미국 보험회사에서 통역을 중간에 두고 인터뷰가 있었다. 수십 가지의 구체적인 질문에 내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질문은 거의 없었다. 점수를 내는 인터뷰도 아니고 취직을 하는 것도 아닌 질문들은 그저 나이에 걸맞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거부하리라는 마음은 일점도 없었다. 많은 질문에 대답을 해 가면서 "! 내가 아직 갈 곳이 아니구나. 나를 거부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가 일주일 후에 나왔다. 센터에서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는 아주 미안한 듯이 "어머니께는 우리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건강하시고 모든 일을 혼자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는 결론을 전해 주었다. 나는 양로보건센터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불합격이었다.

 

영유아 때부터 은퇴를 앞둔 노년기까지 생애 골목마다 시험이 존재한다. 나는 시험 공화국이라는 한국에서도 불합격의 경험은 없는 세월을 보냈다. 내가 합격하려면 몇 년이 흘러야 할까? 무릎을 쓸 수 없어 지팡이나 워커를 의지해야 할 때? 기억이 좋아지는 약을 먹을 때? 밤에 잠을 못 이루고 몇 번씩 일어나서 화장실을 갈 때? 은행계좌를 혼자 통제할 수 없을 때? 쇼핑을 스스로 하지 못 할 때? 혼자 운전할 수 없을 때일까? 약간의 치매 초기 증세가 보인다면 합격일테다. 인터뷰 내용 중 더 많은 것을 혼자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아침 8시에 집 앞으로 와서 나를 태워가고, 프로그램에 참여 시키고 아침 간식과 점심을 제공하고, 또 집까지 태워다 줄 것이다.

기분 좋은 불합격이 가벼운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잠시 게을러지려 했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오게 해 주었다.

 

*이글은 2021 9 3일 중앙일보 문예 마당에 실린 글이다.

문학서재에 올렸으나 컴퓨터의 이상으로 글이 지워진 곳이 많아 다시 수정본으로 올립니다. 먼저 올린 글을 읽어 주시 25명의 독자께 감사의 마음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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