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빛 속에 싸여

2022.01.10 18:55

서경 조회 수:15

산악축제.jpg

 

   갑장 문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 자주 전화를 주고 받는 사이도 아니고, 한국이 주 거주지라 모처럼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은퇴를 하고 미국으로 완전 귀국했다는 말과 함께 오자마자 재미 산악회 회장이 되었다고 보고한다. 회장으로서 첫 행사인 산악제에 축시 낭송을 넣고 싶다며 내게 시낭송을 부탁했다. 낭송시는 좀 길어야 하는데 나는 주로 단시조를 쓰는 사람이고 주제가 산악인을 위한 축시라 난감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부탁이라 팔을 걷고 나섰다. 사랑은 핑계나 이유를 대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는 법. 미주문인으로 한 30년 밥을 먹은 사람이라, 누가 축시를 잘 쓰고 누가 낭송을 잘 하느냐 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왕이면, 문인 회장 낯도 세워줄 겸 축시 잘 쓰시는 정용진 선생님께 시를 부탁하고 자타가 알아주는 낭송 전문가 김태영 문우에게 낭송을 부탁했다. 아뿔싸. 낭송은 할 수 있지만 높은 산길은 운전하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했다. 어쩔 수 없다. 이왕 도와주려고 나선 길. 하루 일을 재끼고 김태영 낭송가를 모시고 산악 축제에 나도 같이 참석하기로 했다.
  초행길인데다 구글 맵이 끊겼다 이어졌다하여 애를 먹었다. 2번 북쪽 프리웨이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겨우 행사장에 도착했다. 멀리서 신회장이 달려와 반겨 주었다.
  평소 서정적인 시를 맛갈나게 잘 낭송하는 분이 이번 축시는 입에 붙지 않아 힘들었다며 옆에 앉아 계속 연습을 하셨다. 원래 돈 나오는 일은 못해도 이런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체질이라 기분이 업되고 즐거웠다.
  숲 속에 들어서자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스카프를 둘렀다. 삼삼 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산악인 옆으로 빙그레 웃고 있는 돼지 머리와 함께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돼지 머리에 고개를 돌렸으나, 죽어도 스마일 눈미소를 짓고 있는 돼지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돼지 돈’이란 한자말에 하얀 피를 쏟고 죽었다는 이차돈의 순교사화가 겹쳐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지가 무슨 순교자라고 웃으면서 죽나...”
  김태영 낭송가도 내 말이 우습다며 함께 웃었다. 한편, 산악인들의 엄숙한 행사에 초대되어 실소하고 있는 내가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미안했다. 산악인들의 무사고를 위해 해마다 산악제를 올리는데 올해가 벌써 36회라 했다.
  히말라야를 뒷동산처럼 오르내리고 고산이란 고산을 다 점령한 전설의 산악인을 비롯하여 산 타는 일이라면 한 가락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듯했다. 우리는 시골 장터에 온 촌닭 마냥 두리번거리며 구경만 했다.
  시도 좋고 낭송도 좋았다는 인사와 함께 우리 앞에 푸짐한 음식이 놓였다. 갑장 회장 덕분에 숲속에서 맛난 점심을 먹고 상쾌한 공기도 흠뻑 마셨다. 김태영 문우와 나는 특별한 자리에 초대받은 기념으로 인정샷이라도 찍어야겠다며 셀폰 앞에 섰다.
  빽빽한 숲 속으로 햇살이 내려 꽂혔다. 찍힌 사진을 보니, 내가 완전 빛 속에 둘러 싸여 있었다. ‘은총’이란 단어가 ‘빛’과 환치되며 주님의 가없는 은총 속에 둘러 싸여 있는 황홀한 느낌을 받았다. 입술을 타고 절로 성가가 터져 나왔다.  
 
... 내가 사랑 받았고 은총 속에 산 것은
... 성령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셨도다
... 주의 참된 평화여 신성한 감격이여
... 주는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내가 좋아하는 성가 34번이다. 이 성가를 부를 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북받쳐 오른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 바친 것 하나 없는 내가 그저 받은 사랑과 은총이 얼마나 많은지!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주님께서 찾아와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셨기에 오늘 날까지 내가 온전히 살 수 있었다. 인간의 약함만 있었다면 내 어찌 이 자리 있으리. 땅에 묻혀도 몇 번은 묻혔으리라.
  숲속을 뚫고 지상에 내려 꽂히는 저 찬란한 햇살! 그 속에 내가 있다. 사랑 받았고 은총 속에 산 내가 지금껏 살아 있다. 신앙의 재발견이다.
  친구를 도와 주려던 작은 선행에 내가 더 큰 상을 받았다. 만약, 내가 축시를 쓸 수 없다고 거절했다면 혹은 일하는 날을 핑계삼아 낭송가와 여기 함께 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충만한 기쁨을 얻지 못했으리라.
  이 기쁨, 이 행복!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랴. 가끔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도 오지랖 넓게 도와 줄 일이다. 애정이 있으면, 방법은 언제나 찾아지기 마련이다.
  되짚어 내려오는 산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숲 속 향기가 얼마나 향긋한지 입술에서는 계속 성가가 터져 나왔다.
  ... 내가 사랑 받았고 은총 속에 산 것은 ...
  그래, 나는 사랑 받았고 은총 속에 살았다. 남은 삶도 빛 속에 은총 속에 싸여 그 분 계획하심으로 살아가겠지. 
정말 행복하고 유쾌한 하루다. 우리는 글렌데일 코스코 앞에 있는 미미 카페에서 해 저물어 어둑할 때까지 담소를 나누며 여운을 즐겼다. (2020. 7) 

 메모: 산악제는 2019. 11. 3일에 있었지만, 글이란 늘 기분에 따라 바로 나오기도 하고 늦게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10년 20년 30년 40년 뒤에도 나오고 종종 사산되는 경우까지 있다. 가끔, 글이 생물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게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전화기마저 물에 빠뜨려 한동안 전화 불통으로 살다 보니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새로 산 전화기 애플 11은 아직 사용법을 잘 몰라 실수 연발이다. 2020 애플 컴퓨터를 구입하여 애플 새 아이디를 쓰는 바람에 기존 전화기와 아이디가 달라 백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애플 11로 글을 쓰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코로나로 답답한 마음, 다시 글로 마음을 풀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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