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밤에 내리는 봄비

2022.03.21 11:37

서경 조회 수:20

밤에 내리는 봄비.jpg

  한 두 방울 차창을 두드리던 비가 시간과 더불어 군단으로 변했다. 수업 일찍 끝난 악동들이 남의 교실 엿보듯, 달리는 차창 밖에서 기웃대며 함께 놀자 보챈다. 그래, 흰머리 소녀라고 감성까지 세었을까 보냐.
  슬슬 속도를 줄였다. 앞차들도 서행을 한다. 거리는 비에 젖어 번들거린다. 네온 간판과 앞차량의 불빛들이 그 위로 멋진 추상화를그린다. 어둠과 빛의 명암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명화. 빛의 작가 렘브란트도 울고 갈 판이다.
  조용조용 얌전하게 내리는 비. 올해 들어 처음 맞는 봄비다. 그것도 밤비라니! 완전 신의 선물이다. 봄비와 밤비. 닮은 듯 약간 다른 모습이 오누이같이 귀엽다. 어감도 좋거니와 감성을 자극하기에도 명콤비다. 콤비까지 등장하니 마치 비 시리즈같다. 봄비, 밤비, 콤비…굳이 조사(토씨)가 붙지 않아도 연결이 자연스럽다.
  하나는 사계절 중 봄을 불러 오고 또 하나는 하루 중 밤을 불러 온다. 둘 다 ‘시간’이란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 시간 속에 ‘지금’이란 시간을 공유하며 나도 같은 공간 속에 거한다. 지금, 여기, 우리. 마치 공동 운명체처럼 친밀감이 더해진다.
  정이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을 때 더욱 증폭된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까지도 공통점을 발견하면 애써 의미 부여를 한다. 마치, 오래 전 같은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반쯤 눈 뜬 사랑이, 음력 생일까지 같다는 걸 알고 운명적 사랑을 느꼈던 것처럼.
  생각에 잠겨 오다 보니, 어느 새 집이다. 차 안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문을 여니 봄비치고는 제법  세차다. 뛰어 갈까 하다가 잠시 비를 맞기로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빛살을 뿌리며 내리는 비가 햇빛 얹힌 눈발같이 오색으로 빛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 오는 님 발자욱 소리. 이장희 노래까지 들먹이며 청각을 자극하는 빗소리. 가지에 물 오르듯, 내 마음도 수관을 타고 촉촉히 젖어든다. 절규하듯 부르던 박인수의 ‘봄비’도 떠오른다. 노래는 절절하나, 오늘같이 가만가만 오는 봄비라면 그렇게 불러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차라리 버들가지처럼 낭창낭창하게 감아주는 것도 좋을 것같다.
  오늘 내리는 봄비는 열정적이다 보다 다정다감하다. 살뜰히도 마음을 다독여준다. 하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는 불안감도 준다. 짐을 매어 놓고 떠나시는 이, 잡아두고 싶은 마음 간절해도 떠나신다면야 잡을 도리가 없다. 하도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염없이 내리다가도 금새 그쳐 버리기도 한다.
  ‘시름없이 내리는 비’도 이제는 옛말. 시절이 하 수상하니, 저도 시름인들 없을소냐. 짐짓 안 그런 척 시침 뗄 뿐,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게다. 밤은 깊어 잠들 시간이지만 빗소리를 더 듣고 싶어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솨아솨아… 바람과 함께 하모니를 이루니 더 음악적이다. 개구리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수평선을 건너 오는 파도 소리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잃어버렸지만 내 귀가 기억하고 있는 소리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꿈의 소리. 그리웠던 밤비 소리요 봄비 내리는 소리다. 박하향처럼 내면의 기쁨이 온 몸에 퍼진다. 충전된 기쁨과 평화. 충족된 그리움.
  어린 시절,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가 그렇게도 좋았다. 양철 지붕에 내리는 빗소리는 왜 맨날 누워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내다 볼 큰 창이 없던 소박한 집이라 그랬을까. 하지만, 비오는 날은 기와집도 부럽지 않았다. 기와집 아이보다 빗소리를 더 가까이 들을 수 있기에.
  한이불 덮고 옹기종기 누웠던 우리 육남매. 이불 끝자락 서로 당기며 실랑이 하던 그날들. 그때 우리는 지금처럼 늙지도 않았고 이빨이 하나 빠지지도 않았다. 이젠 가고 없는 오빠. 천국에서도 비는 내리고 빗소리 아늑할까. 빗줄기 사다리 타고 생각은 천국을 오르락거린다.
  비 오는 날이면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 위해 미친듯이 밖으로 내달았다는 어느 수필가의 글이 떠오른다. 그녀가 살던 곳은 베란다도 없는 16층 아파트. 창밖으로 비 오는 풍경이 펼쳐져도 그토록 좋아하던 빗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몇 번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던 그녀는 결국 그 고층 아파트를 팔고 단층집으로 이사했단다. 오직 빗소리 하나를 듣기 위해. 일 년 중 몇 날이나 비가 온다고. 주변 사람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잃어버린 빗소리를 다시 찾겠다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은 돈보다 절절했다. 사랑은 늘 비계산적 산술을 따른다.
  빗소리는 추억의 소리다. 비 오는 광경을 바라보기만 할 뿐, 빗소리를 들을 수 없다니 그건 하나의 공포였을 게다. 소리를 잃은 비. ‘죽은 아이들의 방’ 사진에 떠돌던 ‘침묵’만큼이나 애닯고 뭉크의 절규만큼이나 절망적이었으리라.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난 힐링 뮤직으로 ‘5분만에 잠드는 빗소리’를 틀어 머리맡에 두고 잔다. 유투브로 듣던 빗소리를 직접 들으니 아늑하고 좋기만 하다.
  오늘은 창밖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해야겠다. 함께 봄비 맞으며 걸었던 옛님도 뛰어 오고, 하얀 민들레 되어 하늘 나라 나들이 갔던 엄니도 꿈길로 돌아 오려나. 아니, 너무 포근하고 아늑한 밤이라 꿈조차 꾸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밤에 내리는 봄비. 봄에 내리는 밤비. 이 정다운 벗들을 불러 함께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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