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해맑은 웃음

2007.03.12 09:35

박봉진 조회 수:826 추천: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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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시샘하는 장맛비가 햇볕과 먹구름을 번가루며 사람들의 기상 그래프를 오르내리게 한다. 오후엔 빗방울이 굵어졌다 싶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뛰쳐나와 날뛰는 맹수처럼 폭우로 변했다. 내가 몰던 자동차는 세찬 비바람 속에서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발톱에 할퀴고 있는 듯 괴로운 소리를 내며 후리웨이를 달렸다. 마구 들이붓는 빗물로 인해 하이 빔 헤드라이트도 바싹 닦아서는 시야의 벽을 밀어낼 수 없었다. 속력을 줄였다. 애꿎은 윈도와이퍼만 더 바빠져서 굵은 물줄기를 차창 밖으로 밀어내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럴 때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구형 볼보 차의 성능이 몹시 걱정됐다. 몇 년 전, 물도 연료도 넣을 데가 없던 ‘데스벨리’를 달리면서 이 불모지에서 자동차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했던 그 불안감이 오늘도 신기루처럼 떠올라 마음을 졸였다. 말이 씨가 되고 예감이 적중하는 것은 대뇌의 텔레파시 작용이 정밀기계처럼 그렇게 이끈다고 했던가. 자동차는 후리웨이 ‘인터체인’을 돌고 있었는데 덜컹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개소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액세레터’를 밟아서 연료를 분출시켰다간 과열된 엔진에 불이 날 것 같았다. 달리던 여력으로 비좁은 가장자리에 자동차를 세우고 깜박등을 켰다. 하필 이런 날씨에... 난감했다. ‘생땍쥐베리’는 인적이 없는 사하라사막에 애기(愛機)가 불시착했을 때 밤하늘의 별과 더불어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나는 수없이 질주하는 자동차행렬 곁에서 군중속의 고독 자가 돼버렸다.

그 자동차는 친구네가 매일 자기 집 앞에 세워두고 있었던 것인데, 얼마동안 내게로 와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그 자동차가 문제를 일으켰었다. 그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던 퇴근 때였고, 인가 밀집 지역이었다. 전화가 필요했다. 조심스럽게 몇 집을 노크해봤지만 인기척도 내보이지 않았다. 한 집에선 퇴근해 들어오는 사람을 붙들고 사정을 했으나 나선 사람과 상대하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이따금 거리에서 본대로 고장 난 자동차 앞에서 한손을 든 채 엄지를 곧추세웠다. 모르는 사람의 자동차를 타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하지만, 그것은 태우는 쪽도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그러나 정비소까지만 신세를 질 작정이었다.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다. 그럴게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옛날에 있었던 일이니까. 할 수 없었다. 얼치기 마라토너가 된들 여기선 누가 뭐라 하겠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조깅하는 사람으로 보여 질 터. 나는 승전보를 갖고 그 먼 길을 달렸던 옛 그리스의 용사인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정비소에 당도했을 땐 막 철문이 내려지려는 참이었다.

그 때 이후 꼭 핸드폰을 지니고 다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먼저 친구네 전화번호를 눌렀다. ‘토잉카’만 보내주면 될 텐데 그는 한사코 내가 있는 데로 오겠다고 했다. 때마침 고속도로 순찰차가 지나가다 나를 봤다. 경관의 마이크소리가 빗소리와 어울려 윙윙거렸다. 자동차의 후드를 열고 있으랬다. 교통법규에는 그리 되어있는 모양이다. 평상시라면 그럴게다. 하지만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어 사람이 자동차 밖으로 나갈 수 없거니와 그대로 했다간 엔진의 전기배선이 물을 뒤집어써서 구제불능 상태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차창을 반쯤 열고 알아들었다는 수(手)신호를 보내 그를 가게 해놓고 도리 없이 그냥 앉아있었다. 휙휙 질주하는 자동차 바람 때문인지 내 자동차는 파도에 떠밀리는 써핑보드처럼 몹시 일렁거렸다. 어떤 자동차는 위험을 느꼈는지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쳤다. 온다는 사람은 왜 이리 더디담-. 조바심은 초침을 앞서가고 있는데 시간은 지루하게 멈춰있다. 별별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사람과 자동차의 상관(相關)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날 자동차는 꼭 있어야 하는 문명의 이기지만, 어떤 의약품도 다른 한편으론 독이 듯이 그 피해도 만만찮을 게다. 끔직한 참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꾸 이어지는 아스팔트는 지구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낸다. 샘물을 못 마시게 하고 대기층을 뚫어 피부노출을 신경 쓰게 한다. 뿐이랴. 자연과 이웃들이 서로 베풀고 아끼며 살았었는데 생태계가 훼손되어감에 따라 제몫 챙기는 본능으로 각박해지고 있다. 내 유년의 등하교 길처럼, 여기도 산과 들과 강을 거슬러 걸어 다니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길섶의 여린 풀꽃과도 눈 맞춤하며 마음 놓고 도란거릴 수 있을 게고. 강심에 떠가는 흰 구름 몇 쪽으로도 우리 삶의 형상을 빚어내고 짜 맞추며 노닐 수 있을 텐데. 나날이 도로망은 퍼져가고 자동차는 많아져 사람들은 어적거린 시간을 질주하는 것으로 자해 예감을 쫓고 있다. 자연과 이웃 간의 사귐을 그렇게 밀쳐버린다. 자기 삶의 여분도 황망히 주파해버리면 종래 무엇이 남을까.

뒤에서 깜박등이 깜박거린다. 내 연상의 실타래도 여기서 풀기를 멈춰야만 했다. 수도관의 터진 데를 알려면 물 꼭지를 틀어보듯, 자동차의 고장 난 데를 알려면 시동을 걸고 살펴야 한다. 혼자서는 할 수가 없었다. 친구는 자동차 앞에서 후드를 열어젖히고 섰다. 나는 키를 돌렸다. 그는 곧 손을 내저으며 중지 신호를 보냈다. 빠져있는 ‘스파크플러그(sparkplug)' 한 개를 제 구멍에 끼우고 공구로 조였다. 그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람의 심장 박동처럼 불씨를 튀겨 연료를 태우며 동력을 내게 하는 중추기관이 아니던가. 바로 그것은 내 일상에서 풀려버린 삶의 정기(精氣)인 것을. 의욕이 엔진의 내압처럼 팽팽했을 때는 앞만 보고 잘 뛰었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휘청거리며 허둥대지 않았나. 심신(心身)의 ‘스파크플러그’는 잘 조여 있는지 수시로 드려다 볼일이다.

시동을 걸라는 신호가 왔다. 부르릉 하고 자동차 발동소리가 힘찼다. 몇 일전에 정비를 했던 사람이 그것을 손으로 끼워 넣고 공구로 꽉 조이는 것을 등한시한 모양이었다. 친구가 내게로 닦아왔다. 그는 흡사 물에 빠졌다 올라온 생쥐 꼴이었다. 그러나 모자 앞창에 맺히는 물방울을 연방 손으로 훔쳐내면서 환히 웃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 조금은 착했을 때의 해맑은 웃음! 너무 오래 잃고 있었던 그 웃음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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