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머위 연가

2007.03.12 09:39

박봉진 조회 수:1155 추천: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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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살자고 했을 땐 어찌 그리 발부리를 거뒀나. 신 발끈 한 가닥도 남기지 않아 그리웠는데 잊을만하니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애간장을 태우는 사랑싸움, 이젠 그만하게 되려나.
    날 아침은 참 우연찮은 만남이었다. 한인타운 슈퍼마켓엘 들렸다 아내가 손짓하는 진열대서 그 모습을 볼 줄이야-. 내 눈에도 틀림없었다. 너무 뜻밖의 만남이라 순간 숨을 깊이 들이켰더니 눈치 빠른 관리인 아줌마가 열기를 지폈다. 미국엔 없는 귀한 것 인데 어느 분의 의탁 품이란다. 도합 여섯 단의 머위. 아내가 떠름이로 카트에 올렸다. 나는 뿌리째 살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며 절반을 진열대에 도로 올려놓았다. 씀씀이나 식탐 나무람이 아님을 아는 아내가 "참 그런 배려를 못 했네요". 라는 말 대신 미소로 동의를 표했다.
    질긴 인연은 내가 네 다섯 살쯤 때 시작됐나보다. 난생 처음으로 혼자 걸어서 가본 데가 서재 터였다. 거기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던 곳이라고 했다. 옛집에서 동쪽 뒤편의 작은 골목으로 꺾어 들면 송홧가루가 풀풀 날리던 산언덕에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 적막함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근처엔 도움의 손길을 줄 사람도 없었다. 무서웠다. 들리는 것이라곤 윙하는 귓속의 이명. 그리고 그 언덕을 덮고 있던 머위 군락이 지워지지 않는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실 그것이 머위였다는 것은 한 참 후 철이 들고 나서 알았다. 그런 적막감은 훗날 미국 이민을 왔을 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가 미국땅에서 처음 집을 샀을 무렵 뒤늦게 이민 온 친지가 짐속에 넣어온 '머위' 두 뿌리를 쥐어주었다. 자기 집이 마련되면 분양해달라는 당부도 했었다. 그것이 땅내를 잘 맡아서 반 평쯤에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산언덕 위에 지은 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머위뿌리를 싹눈대로 찢어 양을 늘렸다. 우리 집 영역의 언덕을 머위 군락지로 만들 요량에 띄엄띄엄 심었다. 자동 스프링쿨러가 매일 물을 주고 있었지만 머위는 잘 크지 않는 것 같았다. 누렇게 떠서 비실거렸다. 뿌리를 파봤더니 맙소사! 그곳이 산을 깍은 생땅이라 착근을 못한데다 그 산의 개미떼가 머위뿌리 속을 다 파먹고 없었다.
   분에 몇 뿌리를 옮겨 심고 시험재배를 했어야 하는 건데. 식물을 좀 안다는 자만과 과욕이 낭패를 자초했던 것이다. 감나무며 대추나무도 몇 구루씩 심어봤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그 박토에서 살 수 있는 식물은 몇 가지 안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차렸다. 고향의 정취를 살려보려던 소박한 내 바람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머위는 세월 저편으로 멀어져간 첫 사랑인양 이따금 내 마음속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초록바탕 아지랑이처럼 아롱거렸다.
   을 줄려 단층집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토질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꼬인 것이 풀리면 매듭도 풀린다는 이치였을까. 어느 날 한 친지가 매물로 위탁받은 집 언덕에 머위가 있더라고 했다. 먼 길이 문제가 아니었다.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단숨에 자동차를 몰았다. 그것은 마른 수풀 속에서 강열한 초록색으로 내 눈을 끌었다. 오래전에 그 집에 살았던 분이 심었던 것 같았지만, 그 다음은 머위를 모르는 사람이 잡초와 함께 방치해버린 듯 했다.
   머위는 다년초라 매년 씨뿌리기가 필요 없다. 언감생심 반듯한 밭 가운데서 자랄 생각일랑 하지 않는다. 밭 언덕이나 자투리땅에 심어놓은 대로 군말 없이 잘 자란다. 여느 식물처럼 속빈 줄 깃대가 가운데서 자라 오르며 둘레로 가지를 뻗치면서 잎을 매달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절제를 자임하고 계통을 단순화한 듯 뿌리에서 잎줄기가 움터서 차차 작은 사슴의 모가지처럼 키를 키운다. 캉캉의 무희 복 같은 둥그스름한 잎사귀를 키운다. 꽃대는 띄엄띄엄 알맞게 땅 밑 뿌리에서 직접 솟아올라 나중에 예녀의 머리 장식처럼 화관이 된다.
   떤 사람은 밭 식물 중에 들깨 예찬론을 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처럼 들깨는 잎은 잎대로 열매는 열매대로 깊은 맛을 내주고 또 줄기는 아궁이에서 음식을 데워주고 재가 되어 작물의 밑거름이 돼준다고 했다. 머위 또한 먹거리로도 만만찮다. 우선 머위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부터 알아야 한다. 머위 잎과 잎줄기는 물러질 만큼 삶은 후, 얼마간 찬물에 담가서 쓴맛을 울 켜내야 한다. 그 잎으로 쌈을 싸먹으면 향긋한 뒷맛이라니-. 식욕 잃은 사람은 구미가 싹 당길 테니 말이다. 잎줄기 속대는 초장에 찍어 먹으면 상큼한 식물 회 맛 또한 일품. 그 껍질도 버리지 말고 고추장단지에 들어갔다 나오면 간간한 밑반찬이 된다.
   위는 내 삶의 볼 수없는 그림자 속을 드나들며 여태 나와 숨바꼭질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리워하면서도 심통 부리듯 서로를 확인한 사랑싸움? 처음은 내가 머위를 떠난 셈이지만, 잠시 만난 후엔 머위가 나를 떠나지 않았던가. 실로 이십여 년만의 해후다. 지금 우리 집 토양이 그전 집의 것보다 나은 것인지, 아니면 이번만은 나무꾼이 선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것의 보상인지는 모르겠다. 머위는 세상의 어떤 대상도 공들이지 않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대언하듯 착근해서 잘 자란다. 요즘 나는 머위 사랑에 흠뻑 빠져있다. 얼핏 수더분하게 뵈는 머위지만 잠시 곁을 떠나있어 보면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매일 아침 눈 맞추고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땐 대비 전에 문안하듯 먼저 둘러보는 것으로는 안 된단다. 오늘은 좀 늦게 들어왔더니만, 머위는 "매미도 울지 않는 낫선 땅에 한낮엔 새들도 어딜 가버리고 없더라"고 토라져 있었다. 견우와 직녀의 성근 사랑으론 축 처진 어깻죽지며 후줄근해진 치마폭을 어찌할 수 없을성싶다.
   위는 매일의 자동 스프링쿨러 빗물로는 목이 한자나 빠지게 감질났나보다. 그러나 물을 더 줄 수도 없다. 마냥 웃자라고 있는 잔디와 관상수들도 물이 주어지는 시간대와 물을 받는 범위가 머위와 똑 같기 때문이다. 이민자와 주류 선주민을 동일 선상에 둔 의무와 분배는 잔디와 머위 관계처럼 서로 실상이 다름을 알려주려는 듯하다. 머위는 그것을 사설(辭說)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선 조리개로 물을 줬다. 곤한 잠을 자고 일어나 듯 머위 잎줄기는 허연 목을 서서히 들고 귀태를 뽐냈다. 후줄근했던 치마폭에 풀을 먹였다. 장미는 화려하나 가시달린 크레오파트라라면 머위는 단아한 소리꾼 예녀이리라. 겨울이 침엽수 계절이면 여름은 엽초 계절이다. 예녀 치마폭에 비 젖는 소리. 초당 앞 연잎에 소낙비 구르는 소리...
   느 아큐어리움에서 보았던 분수쑈가 생각났다. 물보라를 뿜어내기엔 고무호스를 쓰는 것이 제격이렷다. 홍학이 춤추는 왈츠곡 보다 아리랑고개. 삶의 고개를 굽이굽이 넘기로는 우리 가락이 좋을 성 싶었다. 고무호스를 풀어 내렸다. 완창을 하지 않으면 어떻고 손놀림으로 고수를 대신하면 어떠랴. 나는 고수인양 고무호스 끝의 너브를 쥐었다. 멀리 물 내닫는 소리. 빗물은 금세 휘몰이 가락이 급하게 옭아져 줄기 물로 쏟았다. 설설 '허두가'로 마른 목을 조금씩 축였어야 했는데. 순식간에 머위 잎줄기가 쓰러졌다. 흙이 패였다. 황급히 너브를 놓았다. 소낙비도 멈췄다. 쓰러진 머위를 일으켜 세우며 막간 곡을 생각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정말 미안했다. 새색시 가슴에 손을 넣듯 살며시 너브를 쥐어본다. 미세한 봄비 이슬방울. 안개비가 무지개로 내린다.
   물소리는 내 손을 꼼작거리게 하고 춘향을 그네 태운다. 늘어진 진양조 가락이 "당기당기" 그네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나는 숙달된 악사처럼 너브를 약, 강약으로 살짝 살짝 쥐었다 놓았다 다시 쥐어본다. 동산을 넘나드는 중모리 가락에 얼기빗 소낙비와 참빗 소낙비라.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 둥둥 내 사랑..." 중중모리 가락으로 숨 가쁘게 넘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고수의 어깨가 추임새에 떠밀려 들썩인다. 모게지(Mortgage) 페이먼트 난 몰라요. 쇼살(Social Security)넘버는 물렀거라. 그 소리는 소낙비의 등을 탄다. 고무호스 끝에 맴돌고 있는 세상. 이대로 세월 좀 아낄 수 없을까. 가쁜 숨을 고른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요. 한 백 년 임과 함께 사아라보세."
   아. 그 때가 언제였나. 머위는 날 희롱하는 고수 되고. 나는 소리꾼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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