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마음 정원의 봄꽃 '백치동인'

2009.02.05 13:38

박봉진 조회 수:1332 추천: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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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산책길에 흰 나방 속 날개 같은 꽃잎들이 어깨와 옷깃에 묻어난다. 문득 올려본 가로수에 솜구름이 내려않은 듯 배꽃나무 봄꽃의 굼실거림과 멀미. 아 그랬지. 내 마음은 어느새 반세기전의 시공을 거슬러 그 시절 속에 발을 드민다. 그 동인회 산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제비산 기슭 어디쯤의 이소설가 집 고샅길 꽃나무들과 김소설가 농장의 많은 과수 꽃들 그리고 이시인 집의 앵두나무도 지금쯤은 봄꽃망울들이 부풀었을 성싶다.

제는 거의 종심(從心) 연대가 돼졌을 옛 회원들. 부르고 싶어도 직접 부를 수 없었던 이름들, 지금은 어떤 모습들일까. 몇 일전, 새벽4시 조금 지난 시간에 울린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깼었다. 향토 지킴이인 이시인 특유의 고향 억양이 아니었다면 잃고 있은 내 삶의 한 부분을 되찾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대를 공유하며 성장기를 함께 나누었던 ‘백치동인’, 한 생애를 얽고 있는 삶의 소중한 궤적인데 떼어놓아지겠는가. 나는 태어난 나라에 살고 있지 않아 연락이 닿는 LA 송소설가 말고는 해후도 없어 뵈는 옛 동인이다. 더 있지 않을 기회에 피차 연민의 정을 나누게 해주려는 배려는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동인회는 지난 50년대 후반, 고향도시의 남녀고교생 중에 문학소양이 드러났던 학생들 모임이었다. 문학인생의 거의 종착점에 이러는 나를 포함한 옛 회원들에겐 그 때가 이른 아침이고 지금이 저문 날이 아닌지 모르겠다. 시작이 있었으면 마무리 또한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동인지 종간호를 위한 작품과 공동 테마 ‘백치동인 회고’ 글을 주문한 것이리라.

금은 어디서나 남녀학생 친교가 자유롭지만 그 때는 규제가 엄격했다. 그 동인회가 아니었다면 남녀학생들이 그렇게 자주 한자리에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대의 문화 공간, 다방을 이용한 여러 차례 시화전과 낭송 그리고 저명작가들의 문학 강연 때 조연현선생님이 강연도중 쓰러질 뻔했던 것은 어제 일인 듯 선하다. 그러나 보통 때는 마땅한 모임 장소가 없던 터라 이집 저집을 순방하며 친교를 나누었다. 그때 화제였던 전후파 작가 프랑소아즈사강의 ‘어떤 미소’와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에 대한 심도 있는 소견 그리고 자기작품 발표나 토론이랍시고 떠들었던 말들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부단히 자기개발에 매달리며 연관분야에서 종사했던 분들은 대학교수로, 언론사 고위직, 또는 유명작가 등으로 필명을 빛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소양을 꽃피우지 못하고 작고한 사람도 있다. 개중에는 전혀 딴 길을 걸은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런가하면 어쩔 수 없는 생활전선에 매달려있다가 한참 뒤늦게 귀소본능인 듯 문단말석으로 돌아와서 희미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아마 나뿐이 아닐는지.

원한 선남선녀 같아 뵈던 그 시절 그 사람들, 문학인생의 전기라고 할 수 있을 그 모임을 하필이면 ‘백치(白痴)동인’이라 했는지 내겐 그게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와는 좀 빗나갈지 모르지만 나름대로의 생각을 펼쳐도 괜찮을 듯하다. 그 때 누구네 집에서였던지 함께 어울려 원맨쇼며 노래도 부르고 ‘요부의 웃음 흉내 내기’ 여흥을 즐겼다. 무엇이든 척척박사처럼 프로 뺨칠 정도였으나 요부의 웃음만은 모두들 분위기를 살려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에 능숙해야 실속이란 다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됐을 텐데 우리 중엔 그런 사람은 없는 듯하다. 너나없이 사회생활에선 맨 날 손해 보는지도 모르고 어수룩하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문학인생의 진면목, 현세 백치들이여 마음 정원에 봄꽃 피우며 평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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