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2013.03.01 02:06

박봉진 조회 수:871 추천: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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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 박봉진

현 달빛이 밀물처럼 방안을 채웠다. 자정을 한참 지나쳤지만 얼마만의 이른 기침인가. 자판기 앞에 앉자마자 떠오른 것은 ‘보리 겨 떡’과 ‘흑장미’였다. 오래 묵어 있은 내 마음의 기동이다. 그 때 나는 새마을지도자 중앙연수원 제2기 수련생이었다. 제1기 경영자들 순번에 이은 관리자들 입소였다. 연수원은 수원 소재, 서울 농대 묘목 장 인근인 듯했다. 거기서 희귀품종 흑장미를 봤다. 당대의 선도자 유달영 교수와 엿장수 강사도 만났다.

교수는 그 시절 우리들 마음을 사로잡던 존경인물인 터라 감격했다. 복지국가 덴마크의 공식 만찬에는 우리네 식단 간장종기처럼 꼭 ‘보리 겨 떡’ 접시가 오른다고 말했다. 그 시금털털한 것에 누군들 손이 잘 갈까마는-. 황량하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던 땅을 세계의 선견지로 일군 개척기의 상징이라니. 우리 또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보리 고개 없는 나라를 후세에 넘기자는 취지의 말을 자주 들었다. 그 다짐 때는 부르르 옷깃을 여몄다.

장수 강사의 함자와 강연 요지를 확인해보려고 앨범을 펴봤으나 기록이 있지 않았다. 야윈 주름살에다 가무잡잡한 안면엔 민초의 고달픔이 배어났었다. 각지에서 온 수련생들과 몇 분 도지사와 장관, 푸른 집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되지 않지만 쩌렁쩌렁 포호했던 말에 우리는 선입견의 백기를 든 채 그냥 빨려들었다. 대량 증식이 안 돼 귀한 흑장미! 그 엿장수 강사야 말로 묘목 장을 아우른 흑장미였다.

기선 누구나 바닥체험과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상징, 흙색 수련복을 입었다. 신병훈련소 내무반 같은 생활관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새벽 점호에 이은 체조와 행군대열 구보를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0대 후반기 나이, 거기서 나는 젊은 층에 속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헐떡거리는 낙오자들의 안정과 부축은 내 몫이었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선 아침식사에 못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특강에다 사례발표, 분임토의 등 주야 일정이 빡빡해서 한 끼라도 거를 수 없는 상황, 식판을 생활관에 날라주는 것도 내 일 일듯 싶었다.

때를 생각하면 보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 보였다. 터키의 구습을 벗기고 근대국가로 재건시킨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의 개혁역사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차세대 분쟁예방을 위해 무자(無子)를 결행했다는 것도 그곳 여행 때 알았다. 일본을 부국강병의 현대국가가 되게 한 메이지유신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때를 놓칠 수 없는 위국일념, 지도자의 안목과 용단에서 비롯됐을 역사의 일면들이었다는 것이 어렴풋 윤곽으로 그려졌다.

태 나는 평통(平通)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여유 있는 사람들만의 모임’ 무심이 들은 대로 그런가했을 뿐이다. 우연한 계기로 평통 오랜지-샌디에고 지역회 주관 ‘한국인의 정체성과 통일교육’ 수기공모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적이 있다. 그 관계자들을 만나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면면을 봤다. 간과하기 십상인 외국에서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예상 못했는데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오래전, 이민수속 때 거쳐야 했던 소양교육이 떠올랐다.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은 대한민국 대사입니다.” 잊고 있은 그 말의 환생......

구의 말이었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더니 소임에 열중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흙색 수련복을 입었던 사람들이 합성 이미지처럼 오버랩 됨을 느꼈다. 소통과 공감대를 위해 거기도 유달영 교수나 엿장수 강사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성 싶었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들 애국자가 된다던데 왜일까? 유심 중 무심한 내 모습이 되돌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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