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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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실종, 그 이후

2011.07.28 06:51

최영숙 조회 수:722 추천:198

친척 분을 모시고 안과에 갈일이 생겼다.
백내장 수술 날짜를 잡았는데 검사 중 한 가지를 빠트렸으니
다시 오라는 병원의 전화를 받고 나선 길이었다.

병원에 들어서서 등록을 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안과 수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내 비디오를 모니터로
보고 있는 중에, 내 앞을 지나가는 낯익은 남자 얼굴을 발견했다.
낯은 익은데 누구인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자가 내 쪽을 언뜻 바라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백내장 수술 환자가 쓰는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숱이 거의 없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양 옆으로 펴져있고, 그나마 흰색도 아닌 누르스름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납작한 운동화에 흰 양말을 바짝 추켜올려 신고 반바지 파자마를 입고 앉아있는 그의 등 모습은,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서류파일 때문에 더욱 구부러져 보였다.

케빈! 나는 하마터면 케빈,이라고 그를 부를 뻔했다.
칠년만의 해후였다. 그 이름은 내가 소설 안에서 만들어 준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 소설 “실종” 속에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실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차트를 든 남자 간호사가 미스터 뭐라고 긴 단어로 그의 성을 불렀고,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간호사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일어나서 간호사를 따라 진찰실로 들어갔다.

그의 구부러진 등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것에 대해서 신경이 더욱 쓰인 것은 그가 여전히 뭔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911 테러가 일어나던 시기에 돌아가셨고, 그 뒤로 그에게는 셰퍼드만이 유일한 가족으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나는 단편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숱이 적었지만 그래도 검은 머리였고, 내가 일하는 세탁소에서 찾아 간 다림질이 잘 된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열심히 컴퓨터 회사를 오고 가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케빈은 삼십 파운드는 나갈 것 같은 독일산 셰퍼드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사랑하는 강아지를 기쁘게 해 줄 수가 없어서 무거운 셰퍼드를 안고 다닌다는 실제의 이야기를 소설의 처음 장면으로 쓰게 된 것은, 그가 그 이야기를 내게 해줬을 때 내가 그에게 느꼈던 연민 때문이었다.

소설은 표현력이나 구성에서 여러모로 부족했어도, 나는 그 연민의 줄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연민이 다시 솟구쳤다.

  잠시 후에 케빈이 안경을 벗고 진찰실에서 나왔다.
간호사가 그를 안내해서 검사실로 옮겨가는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이쪽으로 가자고 하는데도 케빈은 주춤주춤 대기실 의자에 가서 앉으려 하는 것이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던 간호사가 내 눈과 마주치자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간호사가 이쪽으로 가야한다고 그에게 다시 말하자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인사를 하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케빈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기억을 잃었거나 정신을 놓아버린 방심한 얼굴이었다. 케빈은 주빗주빗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말없이 그의 구부정한 등을 보면서 상상으로 썼던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생각했다. 그 날, 나는 내 연민이 소설 속에서 저지른 인과를 눈으로 본 듯해서 해가 지고 달이 뜨도록 맘이 괴로웠다.  
  
<그의 눈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쓸쓸함도 두려움도 없이 그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스케치북 위에 그를 위해 그려 주었던 동심원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처럼, 주위를 모두 지워버린 듯이 그는 홀로 서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리가 없는 곳으로, 뜨거운 햇빛이 없는 곳으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래서 어디에 서있어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곳으로, 마치 캔사스의 옥수수 밭을 지나 해바라기 밭 속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해바라기가 너무 커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그렇게 그는 조그맣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단편소설 <실종>에서